보이스피싱 수법이 날로 교묘해지면서 피해가 끊이지 않자 금융사들이 소비자 보호 대책 마련에 팔을 걷어붙였다. 인공지능(AI) 기술로 실시간 이상거래를 탐지하고, 기술로도 막지 못한 피해는 무료 보상보험으로 구제하는 등 다층 방어막 구축에 힘을 쏟고 있다. 과거엔 주의 안내에 그쳤다면 이제는 이상거래를 실시간으로 차단하고 피해가 발생하면 사후 보상까지 책임지는 수준으로 발전한 것이다.
은행들은 AI 기반 이상거래 탐지 시스템을 경쟁적으로 고도화하고 있다. AI가 금융사기 의심 상황을 직접 찾아내 차단하는 게 핵심이다. KB국민은행은 고객의 금융거래 패턴과 자금 흐름을 AI가 실시간 분석하는 'AI 보이스피싱 모니터링 시스템'으로 악성 애플리케이션을 잡아낸다.
신한은행은 2022년 말 은행권 최초로 'AI 이상행동 탐지 ATM'을 도입해 현재 전 영업점에서 운영하고 있다. ATM 앞에서 통화를 하거나 선글라스와 모자를 착용하는 등 의심스러운 징후가 포착되면 주의 문구를 띄우거나 본인인증을 요구한다. 인증되지 않으면 거래를 막는다.
하나은행은 2018년 금융권 처음으로 AI에 보이스피싱·대포통장 사고 패턴을 학습시켜 신종 수법까지 탐지하는 이상거래 탐지 시스템을 도입했다. 딥러닝(CNN) 알고리즘으로 과거 데이터에서 유사 패턴을 찾아내는 게 특징이다.
NH농협은행도 AI 기반 시스템을 구축했다. 고객의 금융거래 패턴과 자금 흐름뿐만 아니라 위치정보, 스마트폰 앱 내 악성·원격 앱 설치 등 각종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 보이스피싱 의심 거래를 검출한다. 또 은행권 최초로 의심계좌 모니터링 전담 인력을 배치했다. 전담 직원은 고객 계좌에서 비정상거래가 감지되면 즉시 지급을 중단하고 피해자에게 연락해 피해를 최소화한다.
기술로도 100% 막을 수 없기에 사후 구제장치도 마련됐다. 우리은행은 누구나 영업점에서 가입할 수 있는 무료 보이스피싱 보상보험을 운영하고 있다. 피해 발생 시 최대 1000만원까지 지원한다. 보상보험은 카드와 캐피털, 증권사 등 우리금융그룹 계열사까지 확대됐다.
신한은행도 '금융안심보험'을 통해 금융사기로 금전적 피해를 입었을 경우 일정 금액을 지원한다. 피싱이나 파밍, 스미싱, 메모리해킹 같은 사이버 금융범죄뿐 아니라 착오 송금으로 인해 발생한 회수 비용을 지원하는 특약도 마련했다.
보험사와 카드사도 예외가 아니다. 보험사들은 주로 해지환급금이나 보험계약대출을 노린 피싱 범죄에 취약한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콜센터나 앱에서 본인 인증 절차를 강화하고 있다. 삼성화재는 콜센터를 통한 보험계약대출 신청액이 300만원을 초과하면 신분증 진위를 광학문자인식(OCR)으로 판독하고, 음성까지 대조하는 '이중 인증'을 거친다.
보이스피싱 사고로 인한 금전 손실까지 보장하는 보험 특약도 등장했다. 흥국화재는 업종별 재산종합보험에 보이스피싱 사고 특약을 붙여 수사기관 기소가 확인되면 실제 손해액의 70%(최대 2000만원)를 실손으로 보상한다.
카드업계도 AI 기술을 적극 활용해 보이스피싱에 대응한다. 국민카드는 이상거래 탐지 시 자동으로 문자 알림과 거래 정지를 걸어 즉시 피해를 차단한다. 또 최근 1년간의 사고 데이터를 매월 재학습해 최신 금융사기 수법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고도화했다.
앱과 콜센터만 아니라 대면 창구에서의 현장 대응도 중요하다. AI 중심 예방 시스템 강화로 보이스피싱 피해금 인출이 어려워지자, 피해자가 직접 현금을 찾아 전달하는 대면 수취형 범죄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은행은 직원을 대상으로 보이스피싱 사례와 대응 방법에 대한 비대면 교육을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의심 사례가 발생하면 곧바로 경찰과 공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대면 창구에서 피해금 인출을 막아낸 실적이 높은 지점과 직원에게 별도 인센티브를 지급하기도 한다. 고령층과 외국인 고객, 소상공인 등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보이스피싱 예방 교육과 캠페인도 이어가고 있다.
금융소비자 보호는 이제 금융사의 핵심적인 신뢰 자산이자 경쟁력이 됐다. 최근 법원이 악성 앱을 통한 사이버 금융사기에 대해 금융사의 배상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은 단순한 서비스 차원을 넘어 금융사 리스크 관리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사들은 AI와 빅데이터 등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보이스피싱 예방 체계를 지속적으로 강화해왔다"며 "거래 전 과정에서 의심 거래를 조기에 찾아내는 실시간 모니터링, 창구 직원의 대면 예방과 경찰과의 공조, 사후 보상 등의 방어망을 얼마나 촘촘히 운영하느냐가 금융사 신뢰를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