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8.15 18:24:42
[백세범 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 인터뷰] 뇌와 직접 소통하는 뇌내현실 기술 사람은 뇌로 현실을 이해하고 인식 외부자극과 동일한 전기 신호 주면 현실과 논리, 경험 모든 개념 바뀔 것
“당신을 둘러싼 현실이 정말 현실인가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우리가 뇌와 직접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겁니다.”
철학자가 할 법한 이 질문을 뇌과학자가 던졌다. 백세범 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까봐 조심스럽다”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뇌과학이 펼쳐보일 미래를 설명했다.
백 교수는 이대열 존스홉킨스대 신경과학과 교수와 함께 ‘뇌내현실’이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뇌과학 분야에서 가장 도전적인 질문이다. 가상현실과 대비되는 개념인 뇌내현실은, 감각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뇌와 데이터를 주고 받는 기술이다. 오늘날 가상현실(VR) 기술은 모두 사람의 감각기관에 최대한 생생한 자극을 줘서 현실처럼 느끼게 한다.
반면 뇌내현실 기술은 그 자극에 해당하는 전기 신호를 뇌에 직접 전달한다. 백 교수는 “감각기관은 외부 자극을 전기 신호로 바꿔 뉴런을 통해 전달한다”며 “만약 전기 신호를 인위적으로 보낼 수 있다면 뇌는 현실을 완전히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고 했다.
이는 철학계에서 오랫동안 다뤄온 ‘통 속의 뇌’와 같은 내용이다. 만약 당신의 뇌와 척수를 분리해 영양액이 가득 찬 통에 보관한다고 생각해보자. 뇌가 실제 세상을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전기 신호를 보낸다면, 그걸 현실과 구분할 방법은 없다.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자극은 전기 신호로 바뀌어 뇌로 전달된다. 인간의 눈은 가시광선을 인식하고 전기 신호로 바꾼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시신경이 뇌의 어느 부위와 연결되어 있는지도 알고 있다.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면 무언가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도 수 차례 실험으로 검증됐다.
백 교수는 “감각기관으로 인지하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뇌내현실 기술이 현실화된다면 인간의 지평이 훨씬 넓어질 것”이라고 했다. 지금 인간은 자연의 일부만을 느낄 수 있다. 시각만 보더라도 세상에는 적외선부터 자외선까지 넓은 파장대의 빛이 있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가시광선뿐이다. 실제 자연의 극히 일부만을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만약 가시광선 외의 파장대 정보를 뇌에 입력할 수 있다면,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은 훨씬 더 넓어지게 된다. 이는 청각, 촉각 등 오감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느낄 수도 있을까.
백 교수는 “뇌에는 가소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뇌는 영역별로 담당하는 자극이나 역할이 정해져있지만, 주변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다. 1988년에 이뤄진 한 연구에 따르면, 족제비의 뇌 시각 피질을 청각 기관과 연결했을 때, 뇌는 문제 없이 청각 정보를 받아들인다. 백 교수는 “뇌의 신경 가소성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를 주더라도 적응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이렇게 되면 인간의 뇌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의 뇌는 그 정도의 정보량을 소화할 수 있을까. 혹시 과부하에 걸리지는 않을까. 백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문제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는 감각 기관을 거쳐 뇌로 올수록 정보량이 줄어든다. 컴퓨터의 파일을 압축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경 회로도 불필요한 정보들을 없애고 대상의 본질을 담고 있는 정보만을 압축시킨다. 뇌에 가까워질수록 정보는 압축과 추상화를 반복해 액기스만 남는다. 백 교수는 “처음부터 압축된 정보를 뇌에 넣어주면 된다”고 했다.
이를 입증하는 게 ‘할리베리 실험’이다. 사람에게 영화배우 할리베리 사진을 보여주고 뉴런의 전기 신호를 측정한다. 이후 단순화된 할리베리의 그림, 특징만을 묘사한 캐리커쳐, 심지어 할리베리의 이름만 보여줘도 똑같은 뉴런이 활성화된다. 전체 정보 중에서 뇌리에 남는 건 압축된 핵심 정보 일부라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뇌내현실 기술이 뇌에 데이터를 입력할 때, 데이터 용량 자체는 크지 않기 때문에 과부하의 걱정은 없다.
물론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아직 먼 이야기다. 백 교수는 “특히 뇌에 삽입할 전극 문제의 난이도가 가장 높다”고 했다. 뇌에 전기 신호를 전달하려면 전극을 삽입해야 하는데, 염증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전기 신호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현재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분야에서 전극을 연구하고 있으나, 최대 6개월 정도밖에 쓰지 못한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 그럼에도 왜 뇌내현실을 이야기할까. 백 교수는 “우리는 뇌로 세상을 이해하고 정의하기 때문에, 뇌에 직접 접근하는 순간 말그대로 모든 것이 뒤바뀔 것”이라며 “우리가 당연시 하는 논리, 경험, 철학을 다시 검토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과학자들은 대체로 눈앞의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결국 과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겁니다. 약간은 철학적인 문제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너무너무, 재미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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