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10.01 05:47:03
채권금융기관 지원 협약식 금융위 “석화 감축계획 미진” 설비통폐합·공급축소 하면 만기연장부터 자금지원까지 업계 “지원 요건 까다로워”
공급 과잉으로 위기에 빠진 석유화학 산업에 대한 본격적인 구조조정 작업이 시작됐다. 석화기업에 자금을 대준 채권금융기관(채권단)이 공장 통폐합 등 공급 감축 계획을 제출한 곳을 대상으로 만기 연장 등 금융 지원에 나서기로 하면서다. 다만 정부는 금융 지원도 자구책을 마련한 기업을 대상으로만 가능하다며 세부 계획을 빠르게 제출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전국은행연합회는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KB국민·신한은행 등 17개 은행과 정책금융기관 4곳,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과 함께 ‘산업 구조혁신 지원을 위한 채권금융기관 자율협의회 운영협약’을 맺었다고 30일 밝혔다.
당장 자금줄 확보가 급한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채권단은 연체나 부도 등 채무불이행(EOD) 사유가 없는 정상 기업 가운데 설비 통폐합·공급 축소 계획을 제출한 기업에 한해 만기 연장, 이자율 조정, 신규 담보 취득 제한 등 유동성 지원에 나선다. 필요시 신규 자금을 지원한다는 요건도 포함시켰다.
금융권에 따르면 한화솔루션, 롯데케미칼, HD현대케미칼 등 국내 11대 석화기업이 은행권에서 빌린 여신 총액은 올 상반기 기준 32조8000억원에 달한다. 막대한 자금줄을 통해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도록 ‘실력 행사’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또 은행권은 보다 적극적으로 금융 지원에 나설 수 있도록 자율협약에 따라 만기 연장과 금리 조정 등이 이뤄진 채권에 대해선 자산건전성 분류 기준을 완화해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만기 연장 등 지원에 나서면 대출의 질이 악화할 수밖에 없는데, 석화기업 지원분에 대해서는 정상 여신으로 분류해 대손충당금을 덜 쌓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건의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조용병 은행연합회장은 “석유화학 산업이 글로벌 공급과잉과 근본적 경쟁력 약화라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며 “범정부 차원의 석유화학 산업의 구조 개편 지원에 금융권도 발맞춰 자율협약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채권단 뒤에는 정부가 있다. 이날 정부는 석화 구조조정 속도가 더디다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산업계가 제시한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산단별·기업별 구체적인 감축 계획과 자구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며 “이런 상황에서 최근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산업계 반응이 심히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채권단이 무리한 요건을 들이대며 거꾸로 사업 개편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업계 반응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정부는 앞서 석화기업들이 핵심 원료인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능력을 연내 270만~370만t 감축하는 자구안을 먼저 내놔야 지원에 나설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권 부위원장은 “지금이 (구조조정의) 마지막 기회”라며 “석화업계의 자율적인 사업 재편이 때를 놓치면 채권단 역할이 조력자로만 머무르기는 힘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연말까지 기다릴 것 없이 시장에서 석화 산업에 대한 의구심을 걷어내고, 기업 의지와 실행력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업 재편 그림을 조속히 보여달라”고 촉구했다.
석화업계는 채권단 지원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반응이다. 이에 따라 향후 구조조정 강도를 둘러싸고 개별 기업과 채권단 간 진통이 이어질 전망이다.
한 화학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연말까지 구조조정안을 제출하라고 요구했지만 업황에 비춰보면 기업들이 자구책을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협회 차원에서도 대응을 모색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다”고 전했다.
개별 기업이 주채권은행에 구조 혁신 지원을 신청하면 주채권은행이 채권은행을 대상으로 자율협의회를 소집해 외부 회계법인 공동 실사를 통해 사업 재편 타당성을 점검하게 된다. 자율협의회와 협의를 거쳐 마련한 사업 재편 계획은 산업통상자원부 승인을 거쳐야 한다. 이후 자율협의회와 사업 재편 계획, 금융 지원 방안 등이 포함된 구조 혁신 약정을 체결해 구조조정을 추진하게 된다.
한편 정부는 채권단과 별개로 추가 지원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우선 2조원 규모 한국산업은행 저리 대출 프로그램을 활용해 자금 지원을 유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산업은행은 자율적으로 공장 시설을 통폐합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사업구조 전환 대출을 운용하고 있다. 2%대 중반인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에 가산금리를 더한 후 0.6%포인트의 우대금리 혜택을 주는 저리 상품인데, 올해 예산으로 2조원이 책정된 상태다.
당초 기업들이 과잉 공급을 해소하거나 신사업 분야로 진출할 때 지원해주는 저리 대출 프로그램인데, 기업별 대출 한도가 없기 때문에 석화기업에 이 자금이 우선적으로 투입될 공산이 있다. 또 정부는 정책금융기관에 별도 계정을 운영해 지원하거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산하 기업구조혁신펀드 자금을 활용해 석화기업을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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