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3 15:11:36
그날 이후 침묵의 거리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삼거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태원 거리, 소위 이태원로를 따라 걷다 보면 1층 상가 곳곳에 ‘임대 문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상가 건물 전체를 ‘통임대’하겠다는 현수막도 적잖게 보인다. 인테리어 자재만 널브러진 채 공실로 방치된 상가도 쉽게 눈에 띈다. 해밀톤호텔 뒤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분위기는 더 썰렁하다. 평일 낮 시간대인 점을 고려해도 골목은 서울 ‘황금 상권’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한산했다. 인근 A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이태원 상권은 참사 이후 침체된 상권이 회복하지 못하면서 공실이 늘었다”며 “중대형 상가는 입지·면적에 따라 월 임대료 1200만~3000만원에 임차인을 구하고 있지만 실제 거래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젊은이와 외국인 관광객의 ‘핫플레이스’로 통하던 이태원 상권이 공실 문제로 신음하고 있다. 2022년 ‘이태원 참사’ 이후 유동 인구가 대폭 감소한 이후 상권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모양새다.
이태원은 지금도 공실투성이
상권 침체에도 꿈쩍 않는 임대료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하는 ‘상업용 부동산 임대 동향’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준 이태원 상권 공실률은 중대형 상가 기준 14.44%를 기록했다. 지난해 4분기(19.91%)보다는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서울 평균(8.93%)을 크게 웃돈다. 이태원과 함께 대표 관광 상권으로 분류되던 명동 공실률이 2022년 한때 40%대까지 치솟았다가 올 1분기 11.24%까지 낮아진 반면, 이태원 상가 공실률은 2022년 1분기 9.84%에서 더 악화됐다. 최근까지 공실 문제가 심각했던 신사역(14.27%)이나 신촌·이대(13.82%), 강남대로(12.55%) 상권보다도 이태원에 빈 상가가 더 많다.
이태원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직격탄을 맞고 수많은 자영업자가 어려움을 겪은 상권이다. 팬데믹에서 벗어날 무렵인 2022년 ‘핼러윈 참사’가 발생하며 이후에도 회복세가 탄력을 받지 못하고 꺾였다. 그사이 외국인 방문객과 국내 젊은 층은 새롭고 ‘힙’한 콘셉트를 찾아 을지로, 연남동, 성수동 같은 신흥 상권으로 흩어졌다. 여기에 용산구로 집회·시위 인파가 몰리면서 이태원에 ‘즐기러’ 오는 손님은 더욱 줄었다.
이태원동 B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참사와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젊은 층 발길이 끊기고 외국인 관광객 방문도 눈에 띄게 줄었다”며 “대로변인데도 권리금 없이 나온 상가 매물이 적잖다”고 귀띔했다.
이태원 상권에 노후 건물과 무허가 건축물이 많다는 점도 공실 문제를 가중시킨 원인으로 꼽힌다. 과거 이태원 상권이 활기를 띠던 시절에는 무허가 건축물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상인들이 건물을 수리하고 이행강제금을 내가면서 영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상권이 침체하자 손실을 견디지 못하고 문 닫는 곳이 많아졌고, 돈 들여 수리하지 않은 상가 건물의 노후도는 더욱 심각해졌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이태원 상권은 참사 낙인효과도 있지만 건물 노후화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주차시설과 고객 동선 등 기본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아 상권 자체가 매력을 잃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태원 상권 임대료는 좀처럼 내리지 않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 1분기 이태원 중대형 상가의 임대료는 1㎡당 5만7670원으로, 팬데믹 이전인 2019년 4분기(4만9500원)보다 오히려 올랐다. 최근 핫플레이스로 통하는 연남동(4만6470원)이나 직장인 배후 수요가 탄탄한 논현역(5만3960만원)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이태원 상권의 임대료 변동을 나타내는 임대가격지수(2024년 2분기=100)는 올 1분기 100.9로, 지난해 1분기(99.7)보다 높아졌다.
통상 건물주는 렌트프리(무상임대) 기간을 늘리는 한이 있더라도 겉으로 보이는 임대료 자체는 내리려 하지 않는다. 임대료를 낮추면 부동산 가치가 하락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반면 점포를 운영하는 임차인 입장에서는 매출은 줄고 임대료는 오르니 남는 장사를 못하게 된다. 상권이 확장하는 시기엔 젠트리피케이션을 거치며 일반 자영업자 대신 대기업 임차인이라도 들어오지만, 침체된 상권에서 임차인은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떠난다. 이를 두고 최근 이태원 상권이 가로수길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변 개발 호재 넘치지만…
“유동 인구 유입 미지수” 의견도
이런 상황에도 일각에서는 이태원 상권 투자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상권 인근에는 한남뉴타운 재개발 사업을 비롯해 유엔사 부지 개발 등 개발 호재가 여럿 있어 향후 상권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실제로 한남뉴타운에서는 한남3구역이 재개발 착공을 앞두고 있고 2029년이면 이곳에 5988가구 규모 고급 주거지가 조성된다. 이태원 상권과 맞붙어 있는 한남2구역도 대우건설을 시공사로 정해두고 1537가구 재개발을 진행 중이다. 사업이 좌초됐던 한남1구역도 신속통합기획 계획안 수립을 위한 협의 중에 있다. 이태원동 일대 4만4935㎡ 규모 유엔사 부지에는 총 11조원이 투입돼 지하 7층~지상 20층 규모 아파트 420가구, 오피스텔 723실, 상업·문화·숙박시설 등이 들어선다.
이태원동 C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현재 상권 침체에도 불구하고 강남권 자산가와 투자사들이 지속해서 관심을 보이고, 가격만 적절히 조정되면 바로 매입하려는 수요가 대기 중”이라며 “주변에 고급 주거지를 배후 수요로 두게 되면 이태원 상권은 프리미엄 상권으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효선 NH농협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한강진역 주변에는 이미 편집숍과 명품 거리가 형성돼 있다”며 “향후에는 성수동과 유사하게 고급 주택 단지와 다양한 상권이 혼재된 도보 생활권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반면, 주변 개발 호재가 단기간에 효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는 전문가도 꽤 있다. 우선 주변 개발 사업이 본격적인 모양새를 갖추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지적이다.
송승현 대표는 “주변에서 진행 중인 개발 사업들 역시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가고 사업이 완료돼 자리 잡으려면 최소 5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공실이 많다고 무턱대고 저가 매물을 매입했다가는 오히려 장기간 임차인을 구하지 못해 자금 회전이 막힐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주변 개발이 완료되더라도 기대와 달리 유동 인구 증가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한남3구역 재개발이나 유엔사 부지 개발 등이 이태원 부동산 가치 상승에는 기여할 수 있다”면서도 “다만 이태원 상권은 주변 거주민보다 외부 방문객 소비 기여도가 큰 광역 상권인 만큼 주변 지역 개발과는 별개의 흐름으로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이태원이 외부 방문객뿐 아니라 인근 거주민까지 흡수하는 고급 상권으로 발전하려면 주차시설과 고객 동선 등 기본 인프라가 갖춰져야 하는데, 노후도 개선 등 전반적인 상권 정비가 병행돼야 한다는 조언이다.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1호 (2025.05.28~2025.06.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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