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3 15:10:17
그때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2030세대 사이에서 블루칼라가 유망 직업으로 떠올랐다. 고소득과 워라밸이 보장되고, ‘일한 만큼 벌 수 있어 공정하다’는 인식이 커지면서다.
블루칼라 성공 사례가 각종 언론 매체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활발히 공유되면서, 취준생 사이에선 자연스레 궁금증도 커진다. 어떤 경로를 통해 블루칼라에 입성하게 됐을까. 또 젊은 블루칼라가 체감하는 실제 직업 만족도는 어느 정도나 될까. ‘네오블루칼라’로 현장을 누비는 2030세대 목소리를 직접 들어봤다.
어린이집 교사서 전기 엔지니어로
2년 차 정유진 씨 “매일 성장하는 기분”
정유진 씨(29)는 ㈜ENS플랜트엔지니어링에서 2년 차 전기 엔지니어로 근무 중이다. 대규모 공장 단지 전기 시스템을 구축하는 설계 업무를 맡으며 수·변전 설비 설계, 전선·전선관·케이블 트레이 설계, 도면 작성 등 업무를 한다. 정 씨는 유아교육과 졸업 후 어린이집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좋았지만, 수업과 보육에 더해 수많은 문서와 평가 자료까지 작성하다 보니 하루 일과에 여유가 없었다.
“아이들과의 시간은 소중했지만, 늘 긴장된 상태로 일하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더라고요. 정서적인 피로가 쌓여 번아웃이 왔어요. 결국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에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방황하던 나날 속에서 도로를 다니는 ‘전기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전기는 어디에나 쓰이잖아요. 나 같은 사람도 이 분야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렇게 진로를 전면 수정했다.
정 씨는 한국폴리텍대 성남캠퍼스 전기과에 진학해 전기를 처음부터 배웠다. 용어는 생소했고 강의실 속 유일한 여학생이었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학과 수석을 차지, 전기 엔지니어로 거듭났다. 정 씨는 기술직 매력으로 ‘노력한 만큼 경력이 쌓이면 자격과 실력으로 인정받는 구조’를 꼽는다. 설계는 프로젝트마다 건물 용도나 구조, 전력 수요 등이 달라 업무가 매번 달라진다. 고달프긴 하지만 오히려 매번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어 ‘성장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AI 시대 속에도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 또한 그가 꼽는 장점이다. 전기 설계는 여전히 사람이 주도해야 하는 영역이 많다. 그날마다 다른 현장 조건을 파악하고 개정 법규를 빠르게 적용하며, 타 분야와 협업도 필수이기 때문이다.
정 씨는 전기 기술자 수요가 앞으로도 늘어날 것으로 본다.
“건축·인프라·산업 설비·IT까지 전기 설계가 안 쓰이는 곳이 없어요.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대체 가능성이 커지는 다른 직종과 달리 전기 기술자는 오히려 더 많이 필요해질 겁니다.”
30분 만에 24만원 버는 20대 청년
민병규 밀레니엄페인트 대표
5월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 초여름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 묵직한 공구 가방을 어깨에 멘 민병규 밀레니엄페인트 대표(25)와 최명규 부장(37)을 만났다. 밀레니엄페인트는 민 대표가 1년 전 헬스트레이너 일을 관두고 차린 시공 업체다. 현재는 탄성코트·페인트·줄눈·방충망 교체 등을 전문으로 하며, 자신이 배운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교육 사업도 병행 중이다.
이날은 ‘방충망 교체’ 작업을 하는 날. 방충망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한 민 대표는 교체가 필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분해 고객에게 설명하고, 벌레가 들어오는 원리와 방충망 재질에 따른 차이점을 안내했다. 고객이 필요 이상 비용을 지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의 ‘영업 철학’이다.
먼저 방충망 새시를 통째로 분리해 1층으로 옮긴 후, 낡은 망을 떼어내고 새시를 세척했다. 새 방충망을 새시 크기보다 넉넉히 재단해 올려두고, 이후 롤러를 이용해 문틀 고무 개스킷을 단단히 고정한다. 남은 망을 커터칼로 정리하면 낡은 방충망은 새 단장을 마친다.
총 작업 시간은 30분 남짓. 민 대표는 “보통은 1시간 반에서 2시간 걸리지만, 저는 손이 빠르다”며 웃었다. 방충망 관리법과 주의 사항을 고객에게 꼼꼼하게 안내하는 것까지가 그의 일이다. 이날 교체한 방충망은 총 4개. 작업 비용은 24만원이다.
민 대표는 블루칼라의 진짜 경쟁력은 작업이 아닌 ‘영업’에 있다고 말한다. 방충망 교체는 5월부터 8월까지가 성수기지만, 비수기에도 온라인 마케팅과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꾸준히 고객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날 작업을 의뢰한 고객도 민 대표가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에 올린 작업물과 홍보 글을 보고 연락을 했다.
블루칼라 기술은 여전히 도제식 교육이 주를 이룬다. 현장에서 선배와 함께 일하며 실전 경험을 쌓는 식이다. 이날 함께 작업한 최명규 부장은 올해 1월부터 민 대표와 일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현장에서 천장에 몰딩 작업을 하던 시공 사업자였지만, 건설업 불황이 닥치자 사업을 접고 민 대표에게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최 부장은 “유튜브나 온라인 강의로 기초적인 방법은 익힐 수 있지만, 실제로 작업을 해보면 생각보다 어려운 부분이 많다”며 “대표님과 같이 일하면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실수를 해봐야 진짜 실력이 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항상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민 대표는 과거 기술을 배우던 시절을 회상하며 “기술을 다 전수해주겠다. 세 달만 배우면 된다는 말에 세 달간 임금 없이 일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민 대표는 “기술 업계는 누군가를 정식으로 가르칠 시간이 부족하다. 스스로 익히고, 빠르게 따라와야 살아남는다”며 “단순히 수입만 보고 무작정 뛰어들기보다는, 자신의 적성과 열정을 먼저 점검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복지 직원에서 ‘청소 고수’로
‘숨고’서 가전 청소·수리 진재원 씨
청소 경력 9년 차 진재원 씨(36)가 가진 또 다른 이름은 ‘뽀송송 청소수리’다. 생활 서비스 매칭 플랫폼 ‘숨고’에서 닉네임을 달고 청소 고수로 활동 중이다.
진 씨가 처음부터 청소 고수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지만 취직 대신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했다. 호주에서 그가 뛰어든 일이 바로 ‘외벽 청소’. 언어 장벽과 인종에 따른 임금 차별 때문에 선택한 일이었다.
“카페 바리스타나 레스토랑 서빙으로 받는 임금의 3배를 준다길래 냉큼 청소부 생활을 시작했어요. 호주 시드니 명물로 유명한 ‘오페라하우스’ 외벽 청소를 하는 등 호주에 있는 7년 동안 나름 ‘베테랑 청소업자’로 성장했습니다.”
진 씨가 대학 전공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다. 2022년 한국 귀국 후 약 1년 동안은 사회복지 관련 일을 했다. 사무실에 앉아만 있다 보니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성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중,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봤다. 청소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내용. 영상을 보며 속으로 ‘내가 훨씬 더 잘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3년부터 숨고 고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현재 주 종목은 에어컨·냉장고·제빙기 등 가전제품을 청소하고 수리하는 일이다. 평균 수입은 성수기인 5~8월 기준 한 달에 2500만원, 비수기 기준 500만원 정도다. 진 씨는 “일한 만큼 정직하게 벌 수 있다는 것이 최고 장점”이라며 “열심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추가로 얻게 되는 일감도 많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한 카페에 에어컨 수리를 하러 갔다가, 제빙기와 냉장고까지 손봐주는 식이다.
진 씨는 사실상 ‘1인 기업’이다. 모든 업무를 스스로 해야 하는데 쉽지만은 않다. 진 씨는 “현장 일은 스스로 일감을 구해야 하는 데다 더 많이,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대적으로 크다”며 “마케팅과 고객 서비스까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점은 애로사항”이라고 설명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진로 전환’
포스코 광양제철소 취업, 한건웅 씨
한건웅 씨(30)는 원래 일본에 사는 직장인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일본어에 관심 많았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주일 치 생활비만 들고 훌쩍 일본으로 출국,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2018년 현지 IT 회사 취직에 성공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도 했다.
너무 행복해서였을까. 연이어 불행이 찾아왔다. 2020년 큰 교통사고를 당했고, 심정지가 왔을 정도로 위중한 상태에 놓였다. 직장도 잃었다. 중환자실에서 자기소개서를 쓰는 도중 한 씨에게 회의감이 찾아왔다. 좀 더 안정적인 직장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선택한 건 한국폴리텍대다. ‘기술만 있으면 노후가 보장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부친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2021년 폴리텍대 광주캠퍼스 그린에너지설비과 입학에 성공했다. 설비·용접 분야에 특화된 전공이었다.
남들보다 늦은 출발에 초조했던 그는 2년 내내 강의실 맨 앞자리를 도맡았고 산학 협업으로 롯데마트 방재실에서 일하며 현장 경험도 쌓았다. 졸업 당시 그의 손에는 위험물기능사, 에너지관리기능사, 가스기능사, 공조냉동기계산업기사 등 자격증 4개가 쥐어졌다.
졸업 직후 한 씨는 포스코 광양제철소 ‘발전설비 운전’ 직무로 취업에 성공했다. 제철 시 나오는 가스로 보일러와 터빈을 가동하고 전기를 생산하는 업무다. 업무 만족도와 함께 소득도 늘었다. 일본에서 근무할 때와 비교하면 초봉이 약 3배 이상 많았다.
“기술 베이스가 전혀 없던 늦깎이 학생이었지만 2년 동안 죽어라 공부하고 주어진 교육 프로그램을 잘 소화하다 보면 충분히 한 분야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는 경제적 여유와 안정적 직장이라는 목표를 모두 이뤄 너무도 만족스럽습니다.”
[나건웅·조동현 기자, 정혜승·정수민·지유진 인턴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1호 (2025.05.28~2025.06.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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