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고통스럽게 누워 있다. 끔찍한 이 장면은 미국 작가 알렉스 카버가 관습을 해체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지옥에 빗대 표현한 'Inferno(지옥)' 연작의 일부다. 14세기 걸작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지옥의 9개 원을 통과하며 하강하는 여정을 화폭 위에 옮기면서 사회적, 정치적, 예술적 세계의 변화에 필요한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과정을 신체적 고통으로 형상화했다. 작품의 제목은 'Effigy(승화)'(2024). 그림 속 불타는 인물은 오늘날 만연한 폭력이나 타락한 정치인이 될 수도 있고, 회화적 관습이 될 수도 있다.
알렉스 카버의 아시아 첫 개인전 '승화'가 오는 6월 14일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화이트큐브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지옥(불)' 연작과 '풍경(공기)' 연작 등 신작 10점을 선보인다. 카버는 "현대 회화는 하나의 거칠고 광대한 대지와 같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역사적 공허함과 과거에 대한 향수(또는 집착)로 인한 갈라짐이 있지만, 곧 예술가들의 유토피아적·디스토피아적 환상으로 메꿔져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고 밝혔다.
카버의 작업은 다층적으로 이뤄진다. 프로타주(드로잉 도구로 질감이 있는 표면 위를 문질러 탁본을 뜨는 기법)가 대표적이다. 그는 나무 틀에 고정하지 않은 캔버스 천 밑에 조형물을 놓은 뒤 그 위에 대고 유화 물감을 칠하면서 조형물의 도드라진 부분이 캔버스 위에 드러나게 작업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밑그림 위에 인물 등 다른 요소를 그려 완성하는 방식이다. 밑그림과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이 중첩되면서도 동시에 깊이감이 느껴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낸다.
'Effigy(승화)'(2024). 화이트큐브
카버는 "어떻게 보면 회화는 촉각을 가진 우리 피부와도 같다. 회화 작업에 있어 캔버스 위에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이 되는지, 이것을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수술실 구조 위에 뒤엉킨 사지가 그려진 '무심한 시선'(2024)에서는 흐릿한 인물들이 부드러운 필치로 표현돼 이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짐승과 질감적인 측면에서도 서로 대비된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또 다른 연작인 '풍경'은 대기의 순환을 모티브로 한다. '원시적 축적'(2025)에서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선들은 수술실의 무균 공기 순환 시스템 도면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 '지옥' 연작의 요소들을 가져와 종이에 옮겨 그린 뒤 이를 가이드 삼아 바늘로 폼코어에 구멍을 뚫고, 다시 이 점묘층에 프로타주 기법을 적용해 환영 같은 흔적을 만들었다. 그 결과 지옥 연작에 있던 인물과 요소들은 유령처럼 흐릿하게 남아 변혁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앞서 '지옥' 연작이 파괴를 목격하도록 했다면 '풍경' 연작은 상한 마음에 치유와 휴식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작품의 배치 역시 입구 쪽에서 먼저 '지옥'을 감상하고 안쪽 방에서 '풍경' 을 관람하도록 구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