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4.17 14:32:18
한국 바둑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대결 중 하나를 스크린으로 옮겨온 ‘승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레전드 조훈현(이병헌)이 제자 이창호(유아인)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뜨거운 실제 승부의 열기가 스크린을 뚫고 나온다.
[※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고 바둑 대회에서 국내 최초 우승자가 된 ‘조훈현’. 전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던 그는 바둑 신동이라 불리는 ‘이창호’를 제자로 맞아 가르친다. “실전에선 기세가 8할이야.” 제자와 한 지붕 아래에서 먹고 자며 가르친 지 수년. 그리고 모두가 스승의 뻔한 승리를 예상했던 첫 사제 대결에서 조훈현은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세를 탄 제자에게 충격적으로 패한다. 오랜만에 패배를 맛본 조훈현과 이제 갓 승부의 맛을 알게 된 이창호. 제자에게 패한 조훈현은 타고난 승부사적 기질을 되살리며 다시 한번 올라갈 결심을 한다.
영화의 배경은 모두가 바둑 경기를 실시간으로 관람하던 1980~90년대 한국 바둑계다. ‘오징어 게임’ 시즌2에서 프론트맨이자, 1번 참가자 ‘오영일’ 역을 맡아 극의 흐름을 쥐락펴락했던 이병헌이 영화 ‘승부’로 스크린에 컴백, 세계 최고의 바둑 레전드 ‘조훈현’ 역으로 변신했다. 이병헌은 제자와의 피할 수 없는 승부의 과정과 뒤따른 고통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특히 자신이 발굴한 애제자에게 정상의 자리를 뺏기는 순간의 충격, 제자에게도 숨길 수 없는 패배의 아픔과 다음 경기를 위한 와신상담, 바둑판을 벗어난 일상에서 느껴지는 감정 등을 설득력 있게 연기해낸다. 여기에, 이병헌이라는 배우 개인이 지닌 특유의 넉살이 극에 선명한 채도를 부여한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표정과, 장고를 거듭하며 수를 읽는 바둑 신동 이창호의 성장 과정, 또 스승과의 치열한 심리전을 연기해낸 유아인은 천재 바둑기사라는 이름 뒤에 붙은 ‘인간 이창호’를 대중에게 처음으로 각인시키며 촘촘한 캐릭터 변신을 보여준다. 소년 이창호를 연기한 배우 김강훈의 연기와 함께, 오랜 시간을 ‘조훈현-이창호’ 둘과 함께 보낸 조훈현의 아내 ‘정미화’(문정희), 바둑크루 ‘이용각’(현봉식), ‘천승필’(고창석)의 케미스트리도 볼 만하다.
‘승부’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 영화를 뛰어넘어, 스승과 제자의 역동적인 감정 서사와 함께, 정적인 종목 같지만 무엇보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사각 바둑판’이 인생을 닮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바둑판과 두 기사의 집을 오가는 한정적 배경 속에서 다이내믹한 심리 서사를 끌어내는 감독의 솜씨가 놀랍다. 바둑 자체보다는 관련 사건이나 인물 간 갈등에 집중했던 기존의 한국 바둑 영화와는 달리, ‘바둑’ 자체의 승부에 올곧게 집중한다. 그럼에도 불구, 바둑을 몰라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바둑 영화다.
역사적 대국 자체로 보는 재미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실제 조훈현과 이창호의 옛날 사진과 영상이 삽입돼 있다. 러닝타임 115분.
[글 최재민 사진 ㈜바이포엠스튜디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76호(25.04.2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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