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4.07 06:00:00
머리에 하얗게 눈이 쌓이며, 이마에 나이테가 늘며, 종종 지나온 날들을 돌아봅니다. 서럽고 쓰렸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웃던 날이 훨씬 더 많이 떠오릅니다. 그럭저럭 사람답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들의 배려가 귀한 양분이 되어 주었습니다. 피가 뜨겁던 시절엔, 내가 가진 것보다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동경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답답하고 팍팍했나 봅니다.
마흔을 한참 지난 어느 날, 아이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교내 컬럼대회에서 꽤 좋은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 꼬맹이는 그맘때 저보다 상상력이 뛰어납니다. 글이 더 재미있고 구성도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세자, 글 솜씨가 훌륭하오. 조만간 짐을 앞지를 것 같아 기대가 크다오.”
“아바마마께서 쓰신 글들을 꾸준히 읽으며 카톡필담을 나눈 덕분이라 사료되옵니다. 아바마마와 나누는 어원 이야기들이 떠오르면, 항상 설레고 기쁘옵니다.”
“징그럽소, 세자. 공주도 아니면서 애교를 휘두르지 마시오. 또 무엇이 필요한 게요?”
“요즘 단백질과 비타민이 자주 당기는 것이, 회임을 한 거은 아닌지 근심스럽사옵니다.”
“아, 진짜! 얼마?”
“아부지 맘이쥬.”
피식 웃음지으며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내가 참 소중한 선물들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서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떠오르지 않는 게 있습니다.
‘사랑’.
가슴 벅찬 설렘과 마음 시린 추억이 없다는 건 아쉽습니다. 대학생 땐 아르바이트로 뛰어다니던 기억만, 직장인이 되고 나선 현실에 치어 살았던 날들만 스쳐갑니다. 멋없습니다. 맛없습니다. 소년시절 좋아했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내게도 저런 가슴 시린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올 거라 기대했습니다. 아쉽게도 그런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혹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어이 그 노래를 부르고 싶어, 기어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학예회를 여는 교실보다 소박한 공간에서, 사랑과 이별의 순간을 상상했습니다. 그렇게 가수 최호섭님의 명곡 ‘세월이 가면’을 뜨겁게 가슴 시리게 외치며, 아쉬운 듯 후련해졌습니다. 이젠 그 시간도 가버린 세월로 가슴에 남습니다.
time과 시간(時間)은 비슷한 여러 가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현재의 시각, 일정 시점부터 다음 시점까지의 길이, 무언가 겪었던 기회, 시도의 횟수. 인도유럽조어(PIE: Proto Indo European) ‘di-mon-’에서 왔습니다. ‘da(di의 변형으로 추정)’의 뜻은 ‘나누다(divide)’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지나간 시간의 질량이 증가하면, 남은 미래의 비율은 얼마나 감소할까요? 세월(歲月)은 ‘해 세’와 ‘달 월’로 구성된 한자어입니다. ‘지나간 시간’으로 범주가 좁혀져 뜻이 명료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왠지 아련하고 애틋해집니다.
불현듯 4계절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푸릇한 새싹이 돋아나, 바라보는 계절 봄. 영어 ‘spring’은 식물과 동물에서 튀어나오는 계절이란 뜻이랍니다. 열매가 열리는 여름(열음)의 영단어는 ‘summer’입니다. ‘절반’이란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sama’에서 왔습니다. 1년의 절반에 이른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을은 과실이나 곡식을 ‘따다’, ‘자르다’를 뜻하는 ‘갓다’에서 온 말입니다. 가을의 영단어 ‘fall’은 나뭇잎이 떨어져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단어 ‘Autumn’은 ‘지나가다’를 뜻하는 라틴어 ‘autumnus’에서 왔다고 합니다. 겨울은 ‘집에 머무는(겨시는/계시는) 계절’입니다. ‘계집’이 ‘집에 계시는 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Winter’는 ‘물’/젖은/축축한’이란 의미의 인도유럽조어 ‘wed/wend’에서 왔다는 설과, ‘희다’는 뜻의 갈리어아 ‘vindo-‘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겨울에는 눈과 얼음에 세상이 하얗게 포장되니, 어원과 연결한 상상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시간과 세월이 돌고 쌓이며, 언젠간 저도 소멸할 날이 오겠지요. 마지막 숨 멎는 순간, 세상에 기쁨이 되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오늘도 말의 뿌리를 꾸역꾸역 캡니다.
*감수: 안희돈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건국대 다언어다문화연구소 소장. 전 한국언어학회 회장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3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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