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 제때 안올리다가 한전 부채만 200조원 훌쩍 기업도 요금폭탄 맞고 한숨 전력 직거래 등 활성화하고 한전엔 더 많은 자율성 줘야
한국에서 전력이 시장의 원리에 의해 거래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는 거의 없다. '전력거래소'가 있어 공급량과 도매가를 책정하지만, 실제 최종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전기요금 결정은 전적으로 정부의 결정에 따르고 있다. 그 요금 결정에 원가를 반영한다지만 궁극적으로는 물가, 민생 및 산업에 대한 영향, 그리고 정치적 고려 등이 늘 핵심 변수가 돼 왔다.
선거철이 되면 국민에게 부담이 되는 어떤 결정도 하지 못했다. 한전을 통하지 않고 전력을 생산자로부터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제도가 2003년부터 있었지만 유명무실했다. 원가 이하의 한전 전기가 너무 싸기 때문에, 수요자가 전력을 직접 구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 속에서 한국의 전력 거래 시스템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첫째, 한국전력이 희생적으로 감내하던 부채가 200조원이 넘고 하루 이자 비용만 120억원이 넘는 상황이며, 이를 국고로 보전할 형편도 되지 않는다. 영업이익이 좀 생긴다 해도 이자를 갚기조차 힘든 한계 상황이다. 이는 결국 전기 공급과 전력망의 부실을 초래해 대형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불편한 진실'을 정부가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원가 변동을 그때그때 반영하지 못하고 '폭탄 돌리기'를 했던 전기요금은 결국 단기간 내 산업용 요금 70% 인상이라는 '진짜 폭탄'을 우리 기업에 터트렸다. 단계적으로 인상을 했을 경우 우리 산업은 그에 맞춰 점진적 적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전력 수급과 유통 구조가 정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복잡해졌다. 인공지능(AI) 시대의 폭발적 신규 전력 수요가 계량도 안 되는 상황에서, 데이터센터를 건설·운영하는 쪽에서는 전기 가격 문제보다 충분한 전력 확보가 급선무다. 반면 제조업 분야는 원가 절감이 생존의 길이면서도 전력이 소요되는 AI 융합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특히 어려워진 석유화학 일부 대기업이 드디어 발전사업자와 직거래를 추진하고 있다. 한전은 그간 낮은 전기요금으로 적자를 감수하면서 기업을 지원했는데 지금 등을 돌린다고 섭섭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냉혹한 시장의 원리다. 다만 급격한 쏠림 등 시장의 안정성을 해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 재생에너지 비중의 증가와 분산 전원 시대의 전력 유통 구조는 지금의 통제형·집중형으로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전력 수급의 안정성과 시장성을 균형 있게 조화시킬 새로운 체계가 필요하다. 전기요금을 아직도 대다수 국민이 '전기세'라고 부르며 공공재로 인식하는 것과 경직된 운영 시스템으로는 해법이 안 나온다.
전력 시장은 한전을 중심으로 한 안정 공급을 지키는 주력 시장과 청정 에너지나 분산형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는 시장 거래형 체제가 공존하는 형태로 재편돼야 한다. 신규 전력 도매사업자들도 많이 생길 것이다. 이를 담는 체제가 쉽지 않기에 치열한 연구, 토론, 실증을 늦출 수 없다. 전기요금은 시장 상황을 반영할 독립된 심의기구에서 수시로 정해지고, 엄격한 시장 감시 체제도 필요하다. 일본 등 주요 국가들의 전력 시장 구조가 그렇다.
한전도 세계 속에서 길을 찾는 글로벌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정부부터 한전을 공기업의 틀에만 묶어놓지 말고 다양성과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한국이 계속 선진 경제권에 존속하기 위해서는 AI가 성패를 가르고, 그 성공은 전력의 원활한 수급이 결정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전력 시장 개편은 반드시 새 정부 초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니면 포퓰리즘 속에서 한국의 에너지 상황은 긴 터널로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