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열린 제19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의 주인공들은 모두 팔순을 넘긴 어르신이었다. 50년, 강산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아픈 사람들을 돌보느라 30대 청춘이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전진상의원·복지관의 배현정 원장과 유송자 사회복지관장, 최소희 약국장 등이 서울 시흥동에서 의술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1975년이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빈민에 대한 의료 지원을 요청하고 국제가톨릭형제회(AFI)가 후원해 당시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이던 이곳에 약국과 무료 진료소를 연 것이 출발점이다.
이렇다 할 병원은 물론 약국조차 없던 동네에서 배 원장 등은 환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돌봤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병원에 올 생각조차 못하던 시절이었다. '환자는 의사를 만날 권리가 있다'는 설립 정신은 50년간 변함없이 지켜져왔다. 전진상의원이 아직도 매주 목요일 방문 진료, 월·수요일 야간 진료를 하고 있는 이유다. 정몽규 포니정재단 이사장도 지난 12일 시상식에서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전진상의원·복지관은 '환자는 의사를 만날 권리가 있다'라는 창립 초기의 신념을 굳건히 이어가고 있다"며 경의를 표했다.
당연시돼야 할 환자의 권리가 커다란 울림을 주는 이유가 있다. 환자를 외면할 수 있는 의사들의 권리가 도드라지는 현실 때문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지만,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은 여전히 복귀를 미루고 있다. 의대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의사 가운을 반납한 지 1년4개월. 수술방과 응급실, 중환자실에 있어야 할 전공의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안타까운 희생이 이어졌다. 심정지 환자가 상급종합병원 전원을 거부당해 앰뷸런스에서 숨을 거두는가 하면, 교통사고 피해자가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해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빅5로 불리는 서울 5개 대형병원의 주요 7종 암 수술 건수는 지난해 50% 급감했다.
전공의 이탈 사태는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진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환자를 볼모로 삼은 것과 같다. 만약 소방관들이 근무 여건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집단으로 화재 현장을 외면한다면? 경찰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범죄 수사를 거부한다면? 사회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의 직업윤리가 이들과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년 반 가까이 이어진 의정 갈등에서 환자들은 철저하게 종속변수였다. 정부가 개혁한다는 의료 서비스의 소비자이자 단체행동에 나선 의사들의 고객인 환자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부는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의사들은 일방적으로 행동했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정신은 실종됐다. 전진상의원·복지관의 50년 의료봉사 역정이 웅변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의사는 의학적 전문지식뿐만 아니라 환자 중심의 가치와 사회적 책임까지 가져야 한다.
최근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전공의들이 복귀를 타진하며 여당에 대화를 제의하는가 하면, 강경 투쟁 일변도였던 대한전공의협의회 지도부를 탄핵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의대생들도 수업 복귀를 막는 선배들을 상대로 소송을 추진하거나 학교와 교육당국에 신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정부와 여당, 전공의들이 대화를 통해 출구를 마련하고 머지않아 집단 이탈 사태가 해결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부디 이번에는 전공의들이 환자의 건강권을 최우선시하고 대승적으로 복귀 결정을 내려주길 바란다. 정부도 포용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복귀 조건을 두고 전공의들과 줄다리기를 하느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