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온 몸 기울여 이룬 시(詩)를 쉽게 지우며
세상에 지우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였다.
내가 딛고 선
마른 풀잎의 언어와 안일의 둥지를 지우고
나는 외출하였다.
골목어귀에서 만나는 찬바람의 행로를 한올 한올 지우고
바람떼에 매여오는 누운 풀잎의 얼굴들도 지우고
바라보는 하늘엔 별 하나 없이
비가 내렸다.
모든 둥지에 빗물이 고여도
사람 하나 날질 않았다. (후략)
- 강태형 '고무 지우개를 들고' 부분
오래된 책장 한구석에서 스스로 잊히길 원했던 시인의 시를 보았다.
시인은 작은 지우개 하나로 스스로를 지우려 했던 걸까. 세상엔 지워야 할 것들과 지우고 싶은 것들이 차고 넘친다.
흔적을 지우고 별을 지우고 나를 지우면 세상은 좀 더 투명해질까. 그 투명한 자리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얼굴이 다시 태어나려는 나의 의지일 순 없을까.
지우고 싶은 것들이 그 자리에서 끝없이 버티려 하는데 정작 지워져선 안 되는 것들이 자꾸만 망실돼 간다.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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