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진부한 격언을 실천하는 시간이 있다. 당직 근무를 마치고 자정 넘어 퇴근할 때다. 몸은 피곤해도 이 시간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있다. 차 시동을 걸기 전 집에 가는 길에 들을 음악을 신중히 고른다. 나만을 위한 '심야 음악 감상회'가 열린다. 소란이 가라앉은 서울은 일종의 수수께끼 같다. 그 풍경을 음악과 함께 가로지르면 마치 대도시를 탐험하는 것 같다. 이 순간을 좋아한다.
얼마 전 '델포닉스(The Delfonics)' 음악을 들으며 퇴근했다. 동호대교를 지날 때 'Didn't I Blow Your Mind This Time'이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영화 '재키 브라운'(1997)의 테마곡으로 유명한 노래다. 언제 봤는지도 가물가물한 그 영화가 불쑥 떠올랐다. 멜로디의 여운이 완전히 증발하기 전에 이 영화를 다시 찾아봤다.
재키 브라운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최고작을 뽑을 때 가장 먼저 호명되는 작품은 아니다. '펄프픽션' '저수지의 개들'처럼 강력한 후보군과 비교하면 다소 평범하다. 하지만 이 영화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다. 음악만 놓고 보면 타란티노의 대표작들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 1970년대 미국 흑인 문화를 오마주 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영화답게 이 작품엔 델포닉스처럼 그 시절을 대표하는 감미로운 흑인 음악이 흐른다. 내 기억 속에서 이 작품은 '타란티노가 힘을 빼고 만든 깔끔한 범죄 영화'였다. 하지만 최근 이 작품을 다시 본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 영화의 장르는 근사한 로맨스다.
주인공 재키 브라운은 마흔을 넘긴 항공사 여성 승무원이다. 생계를 위해 밀수를 돕다가 적발됐다.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우여곡절 끝에 경찰과 범죄조직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한다. 그 과정에서 재키는 56세 보석 보증인 맥스 체리를 만난다. 맥스는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도 없는 무뚝뚝한 남자다. 유능한 해결사들이 그렇듯 이 남자는 무언가를 체념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데 재키와 처음 만난 순간, 이 남자의 사막 같은 마음에 잔잔한 물줄기가 흐른다. 재키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본인도 이 남자에게 어떤 끌림을 느낀다.
재키는 위험한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맥스가 본인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이용해 그를 활용한다. 맥스는 모든 걸 알면서도 조용히 돕는다. 어떤 내색도 없이 재키를 위험에서 구한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후 재키는 비로소 위험한 일에 맥스를 끌어들인 것이 신경 쓰인다. 마음의 짐을 털어내려 맥스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속이지 않았어요. 우린 파트너였죠." 그러자 맥스는 무심하게 대답한다. "내 나이는 쉰여섯입니다.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누구의 탓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이제, 일터로 돌아가야겠군요"라고 말하며 조용히 등을 돌린다.
찰나의 끌림이든 연민이든, 누군가를 지키기로 결정한 남자. 자신의 감정이나 희생에 대해 일절 내세우지 않고,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 담담한 태도. 만약 이 세상에 '근사한 마초'라는 개념이 있다면 맥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며칠 전에도 당직을 마치고 심야 음악 감상회를 열었다. 가사가 없는 음악을 골랐다. 적막한 서울을 가로지르면서 생각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남 탓하지 않는 어른의 품위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