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3 15:07:46
(40) 버지니아 울프의 성생활
아내에게 애인이 생겼다. 정신적인 교감을 넘어 육체적 관계까지 맺은 사실을 알아버렸다. 하늘이 노래지고 삶의 균형감각이 무너질 법도 한데, 외려 후련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과거 극심한 우울감에 음식도 대화도 거부한 게 며칠째. 아내가 생기가 도는 표정이 얼마 만인지. 신혼 때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불륜’ 상대는 평범하지 않았다. 아내의 애인은 여성이었다. 동성연애에 빠진 것. 남편은 생각한다. 이 불륜 관계가 오래가기를. 그녀의 행복이 지속되기를.
동성연애에 빠진 유부녀의 이름은 ‘버지니아 울프’다. 오늘날 ‘페미니즘 바이블’로 통하는 ‘자기만의 방’을 쓴 영국 작가다. 울프 부부의 삶은 그 누가 봐도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문학의 영토를 넓힌 비료 역할을 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쉽지 않았다. 각각 재혼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버지니아였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전 결혼에서 딸 하나, 어머니 줄리아는 세 자녀가 있었다. 스티븐과 줄리아는 버지니아를 포함해 아이 넷을 더 낳았다. 씨가 다르고, 배가 다른 형제 8명이 한 울타리에서 살아야 했던 셈이다. 가정에서 북적거림은 늘 풍요를 상징하지만은 않는다. 타고 나기를 내성적이었던 버지니아에게는 버거웠고, 또 불편했다.
그런 버지니아의 심성을 잘 알고 있던 아버지는 그녀를 위한 공간을 내어줬다. 자신의 서재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서재는 ‘금녀의 공간’이었다. 스티븐이 작가로서 당대의 고루한 관념에 도전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버지니아는 아버지가 조용히 비춰주는 촛불을 따라 책들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소음조차도 발길을 멈추는 곳, 그곳에 버지니아는 자신을 유배하고 있었다.
1895년 5월 버지니아 나이 고작 13세였을 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어느 날 자고 있던 버지니아의 침실에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들어온 인물은 ‘조지’. 그녀의 의붓오빠였다. “잠시 할 얘기가 있다”면서 느닷없이 방으로 들어온 조지는 버지니아의 침대에 눕는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던 조지의 손은 가지 말아야 할 곳까지 향했다. 아버지가 자리에 없을 때면 조지는 수시로 버지니아를 찾았다. 어린 버지니아에게 ‘성’이 끔찍한 트라우마로 각인된 이유다. 삶의 즐거움이어야 했고, 사랑의 방법이어야 했던 성은 그에게 상처이자 아픔이 됐다. 신경쇠약과 정신착란이 찾아왔다. 구명줄이 돼준 건 ‘글쓰기’였다. 상처에 붕대를 붙이고, 우울함이 가득한 심해로 빠지지 않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 그녀는 언니 바네사와 독립을 결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다니는 오빠 스티븐(아버지와 동명)이 사는 런던 블룸즈버리였다. 지옥 같은 트라우마를 남긴 고향으로부터 탈주이기도 했다.
블룸즈버리에는 허우적거리고 있는 버지니아를 쥐고 잡아주는 ‘동아줄’이 많았다. 오빠 스티븐의 대학 친구들이 집에 모여 문학·그림·사회·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명 ‘블룸즈버리그룹’. 모임에서는 나이도, 출신도, 성별도 중요하지 않았다.
블룸즈버리그룹은 보수적인 사회를 향한 ‘저항의 공장’이기도 했다. 영국은 남녀가 유별하고, 남녀에게 주어진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나라였다. 블룸즈버리그룹은 이를 보란 듯이 비웃었다. 남자와 남자가 연애하고, 여자와 여자가 키스하는 곳. 때로는 세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여자라는 이유로 숨어서 책을 읽어야 했고, 남성인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했던 버지니아에게 블룸즈버리그룹은 지적으로나 성적으로나 산소호흡기 같은 역할을 했다.
1912년 버지니아에게 한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청혼을 위해서다. 같은 블룸즈버리그룹의 레너드 울프. 버지니아의 아픔과 지적 허기를 알고 살뜰히 챙겨준 남자였다. 그녀는 레너드에게 답했다. “저는 당신에게 육체적으로 끌리지 않아요.” 그가 바로 말했다. “괜찮아, 그저 내 옆에만 있어줘.”
레너드는 그녀에게 최고의 남자였다. 문학적 동지면서 그녀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최고 조언자였다. 버지니아라는 ‘글’의 제1독자이자 편집자가 바로 레너드였다. 버지니아가 첫 장편 소설 ‘출항’을 출간한 것도 그의 공이었다. 두 사람은 1917년 호가스출판사까지 함께 설립했다. 글쓰기만이 버지니아의 구원인 걸 레너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대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1922년 어느 날, 버지니아는 그동안 잊고 있던 강렬함을 느꼈다. 한 저녁 모임에서 비타 색빌 웨스트를 만나면서였다. 시인이자 소설가로, 남녀 불문 여러 연애를 즐기는 자유 영혼이었다.
버지니아는 마찬가지로 유부녀였던 비타에게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 어떤 사내보다 당당하게 세상에 자기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버지니아 자신에게 모자란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은 우정의 편지를 주고받다,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갔다.
첫 만남이 있은 지 3년 후부터는 육체적 관계까지 맺었다. 버지니아는 잊지 못할 황홀함을 느꼈다. 의붓오빠로부터 당한 성폭력 이후 남성과의 육체적 관계는 언제나 괴로움을 떠올리게 했다. 비타와의 관계에서는 달랐다. 여성이 주체가 된, 동등한 관계로서 부드러움을 교환해서다. 놀랍게도 남편 레너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받아들였다.
1928년 버지니아가 소설 ‘올랜도’를 발표한다.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미남 귀족 ‘올랜도’의 이야기. 남자로 태어나 중간에 성별이 바뀌는, 일종의 판타지적 설정. 성별의 뒤바뀜에도 올랜도라는 본질이 바뀌지 않는 데 버지니아의 통찰이 있다. 개인을 규정하는 건 타고난 사람의 성품이지, 사회가 주입하는 성별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누구보다 당당했던 사람 ‘비타’를 보고 깨달은 통찰이 ‘올랜도’에 담긴 셈. 1929년 에세이 ‘자기만의 방’까지 발표하면서 그녀 이름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러 차례 강단에 섰다. 여자를 순종적인 존재로서만 살게 하는 사회에 저항하라는 메시지였다. 그녀는 얘기한다.
“셰익스피어 같은 위대한 여성 문호가 없는 이유는 우리가 재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셰익스피어와 같은 업적을 남길 펜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 훌륭해질 수 있습니다.”
1941년 버지니아 내면에 죽음의 꽃이 피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혹평과 2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전쟁의 기운 탓이었다. 삶보다 죽음이 찬양받는 시대. 그녀는 다시 죽음을 생각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엄마, 아빠, 오빠. 꿈에서도, 눈을 뜨고서도 그들의 상흔이 아른거렸다.
호숫가를 걷고 있던 버지니아에게 묵직한 돌 뭉치가 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돌을 주워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양 주머니가 가득 찼을 때 그녀는 호수로 몸을 던졌다. 남편 레너드의 책상에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버지니아가 남긴 것이었다.
“더 이상 당신의 삶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 우리보다 행복했던 사람은 없을 거예요. V(버지니아의 이니셜).”
여성에게 채워진 족쇄에 도끼질로 저항했던 작가, 그 격렬한 몸짓에 자신마저 침전해버린 사람이 바로 버지니아 울프였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1호 (2025.05.28~2025.06.03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