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3 15:07:35
대선 토론에서도 불붙은 스테이블코인
국내 대선 레이스가 한창인 가운데, 스테이블코인 이슈가 뜨겁다. 국내 디지털자산(코인) 거래소 이용자가 1600만명을 넘어서며 대선 표심 주요 층으로 떠오르면서다. 전체 유권자 약 36%이다. 대선 주자들은 저마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허용 여부를 두고 각기 다른 정책을 제시하며 표심 잡기에 나섰다. 과연 스테이블코인이 뭐길래 대선 어젠다로까지 등장했을까.
트럼프의 선택은 스테이블코인
CBDC 금지하고 스테이블코인 육성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도 스테이블코인은 마찬가지로 주요 대선 이슈 중 하나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찍이 선거 유세 때부터 “CBDC 발행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며 강력 반대 의사를 밝혔다. CBDC는 정부가 발행한 디지털화폐다. 트럼프는 CBDC를 통해 시민 금융 거래를 들여다보고 통제할 수 있다는 우려를 공약에 반영했다. 요컨대 프라이버시 침해와 과도한 정부 개입에 대한 두려움이 CBDC 반대 배경이었다.
그렇다고 디지털화폐 경쟁에서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올해 초 트럼프가 발표한 행정명령에는 연방기관이 CBDC를 추진하거나 홍보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성장시키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중국식 CBDC 대신 미국은 민간의 창의성을 무기로 삼아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세계적 사용을 늘리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마치 냉전 시대 우주 개발 경쟁이 코인으로 옮겨와 ‘정부 vs 민간’으로 펼쳐지는 듯한 양상이다.
스테이블코인의 부상
글로벌 머니에서 메타버스 화폐까지
트럼프 정부까지 등에 업은 스테이블코인.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주목을 받고 있는 걸까.
스테이블코인은 애초에 비트코인 등 코인을 사고파는 거래 통화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쓰임이 가상자산 시장 바깥 현실 경제로 확대되고 있다. 예컨대 통화 가치가 하락하는 고인플레이션 국가들에서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대안 통화로 쓰이고 있다.
국제송금 분야에서도 스테이블코인 활약이 눈부시다. 전통적인 달러 결제망을 통하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만,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 송금은 몇 초 내 결제가 완료되고 수수료도 거의 무료에 가깝다. 페이팔의 경우 자체 스테이블코인(PYUSD)을 발행해 160개국에서 무료 송금을 시작했다. 여기에 미국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는 PYUSD와 미국 달러 간 무료 환전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테이블코인 실사용을 확대하려는 전략이다.
이 점에 주목해 일부 신흥국 기업은 무역통화로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국제 경제 제재를 받는 국가가 달러 결제망 우회를 위해 스테이블코인과 비트코인을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실제 지난해 10월 브릭스 정상회의에서는 탈달러화를 위해 코인 교역을 촉진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일부 러시아 석유 기업들은 중국·인도와의 교역 대금 정산에 테더 같은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고 있다.
메타버스와 가상 경제에서도 스테이블코인의 잠재력은 크다. 가상현실 세계 경제활동에 현실 통화를 그대로 쓰긴 어렵지만, 가치가 안정된 스테이블코인은 메타버스 속 통용 화폐로 적합하다. 앞으로 VR 헤드셋을 쓰고 가상 상점에서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질지도 모른다.
CBDC vs 스테이블코인
경쟁인가 공존인가…통화 패권 경쟁
현재 전 세계 중앙은행의 93% 이상이 CBDC를 연구하거나 파일럿을 진행 중일 정도로 CBDC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민간 부문 주도 스테이블코인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러한 정부 vs 민간 구도는 향후 디지털 통화 패권 경쟁의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CBDC와 스테이블코인이 반드시 제로섬 경쟁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둘이 추구하는 가치와 강점이 다르기에 상호 보완 또는 공존 여지도 있다는 것.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통제하므로 신뢰성과 공공성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혁신성과 편의성에서 앞선다. 중국이 아무리 CBDC 기술을 과시해도, 이미 시장에 널리 퍼진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더 빠르고 저렴하다면 사용자들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CBDC와 민간 디지털화폐들이 한 플랫폼에서 공존하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실제 미국 뉴욕 연준은 ‘프로젝트 RLN’이라는 실험을 통해 CBDC, 은행 예금토큰, 스테이블코인 등 디지털자산이 단일 네트워크에서 함께 거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트럼프의 반대로 이렇게 준비했던 CBDC를 못 쓰게 된 반면, 이 모델을 좇아 연구한 한국은행은 요즘 CBDC 실험을 진행 중이다. 다만 CBDC 고유의 개인정보 추적 이슈는 여전히 남은 과제다. 아무리 하나의 네트워크에서 스테이블코인과 공존하도록 하더라도 CBDC는 태생적으로 추적 가능한 화폐이기 때문이다. 향후 디지털화폐 시대의 프라이버시 보호는 피할 수 없는 쟁점이 될 전망이다.
결국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투명성과 익명성 사이의 균형점을 어떻게 찾느냐에 따라 CBDC와 민간 화폐의 관계 설정도 달라질 테다. 최근 스테이블코인 성장세가 이러한 논의를 더 시급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2400억달러 수준인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3년 내 2조달러를 넘어서는 등 급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각국이 CBDC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정작 세계 시민들은 더 편리한 스테이블코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한국은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스테이블코인 발행·유통 지원해야
한국 같은 개방 경제 국가 입장에서는 굳이 하나의 진영만 선택해 따라가기보다는 양쪽을 아우르는 유연한 전략이 바람직하다. 디지털화폐 시대에는 어느 한 통화만 독점적 지위를 갖기 어렵고, 다양한 디지털화폐가 견제와 균형 속에 공존 발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CBDC 공공성을 확보하면서도,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와 한국은행은 법·제도 정비를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유통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가령 은행이나 지급결제 기업들이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이를 규제 샌드박스 형태로 시험해 볼 수 있다. 또 해외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에서 쓰일 경우 이용자 보호 장치와 과세 등 편입 방안을 마련해둬야 한다.
동시에 CBDC 설계에는 프라이버시 보호 기술을 접목해 국민 신뢰를 높이고, 해외 CBDC와 스테이블코인과의 호환성도 고려해야 한다. 디지털화폐 표준 경쟁이 치열한 만큼, 국제 협력과 표준 주도에도 참여해 우리 목소리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결국 한국이 지향해야 할 것은 폐쇄적 통제가 아닌 개방적 혁신 관리이다.
미·중 간 펼쳐진 디지털 통화 패권 경쟁은 어쩌면 21세기형 냉전이다. 다가올 미래에는 각기 장단점을 지닌 여러 디지털화폐가 경쟁하며 공존할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디지털 위안의 부상에도 대비하고, 달러 패권의 조력자인 스테이블코인도 활용해야 한다. 기술 변화의 파고 속에서 공공과 민간의 지혜를 모두 끌어모은 나라만이 새로운 통화 질서의 설계자가 될 수 있다.
[홍익희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1호 (2025.05.28~2025.06.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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