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킹발 실제 피해 사례 없는데 막무가내로 위약금 면제 요구 회사 귀책여부 판단 아직 일러 냉정하고 이성적인 접근 필요 명확한 사실관계 확인이 먼저
SK텔레콤 해킹 사태 이후 위약금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가입자들이 타 통신사로 이동 시 위약금을 전면 면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SK텔레콤은 유심보호서비스만으로도 해킹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더 확실한 조치를 원하는 이용자들에게는 유심을 무료로 교체해주고 해킹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면 100% 책임지겠다고 수차례 밝혔지만 위약금 면제 주장에 가려져 관심사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유출된 정보가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불안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이용자들의 냉정한 평가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위약금 면제 주장은 과도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정치권의 위약금 면제 주장에 포퓰리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점이다. 해킹 사태 4주 차에 접어든 지금까지 실제 피해 사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해킹이 원인이 돼 복제폰이 생성되고, 복제폰을 통해 금융자산 탈취 피해가 발생한 사례가 단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다. 피해 규모 등에 대한 정부 조사도 진행 중이다. 구체적인 피해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적 판단도 없이 일방적으로 위약금 전액 면제를 요구하는 것은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 원칙에도 어긋난다.
계약의 신뢰성을 흔든다는 점도 문제다. 통신사는 이용자와 단말기 대금을 지원해주거나 통신요금을 할인해주는 대가로 일정 기간 가입을 약정하는 방식으로 계약한다. 위약금은 계약 이행의무를 지키지 않은 데 따르는 대가다. 어감상 '징벌'의 느낌을 주지만 사실은 통신사로부터 할인 형식으로 미리 받은 돈을 돌려주는 것이다. 이를 면제하라는 것은 해당 금액만큼의 혜택을 새로 주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회사의 귀책 사유로 인한 중도해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각에서는 해킹 사고 자체를 회사 귀책사유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말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은 문제다. 보안에 신경을 썼는데도 불가피하게 당한 천재지변인지, 보안 조치 미비로 인한 인재인지 따져봐야 한다. 판단은 정부 조사 결과가 나온 뒤에야 가능하다.
과거를 살펴봐도 위약금 면제 사례를 찾기 힘들다. 개인정보 유출 사건들은 대부분 소송 등 법적 절차와 개별적 협상을 통해 보상이 이뤄졌으며 보상금은 실제 피해를 기준으로 산정됐다. 2021년 전·현 고객 7660만명의 이름, 생년월일, 사회보장번호, 운전면허증 번호 등이 포함된 신용조회 데이터가 유출되는 사고를 겪었던 미국 T모바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T모바일은 소송을 제기한 가입자들에게 계좌 동결 등 보안조치에 따른 피해 규모에 따라 1인당 25달러에서 최대 2만5000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SK텔레콤은 위약금 면제 시 한 달 기준 최대 500만명이 이탈할 수 있으며 위약금 면제와 그에 따른 매출 감소까지 고려하면 3년간 7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된다고 밝혔는데, 실제 손실은 더 클 수 있다. 이유 불문 위약금을 면제해준다면 SK텔레콤 이용자들은 지원금 덕에 싸게 산 휴대폰으로 통신사만 옮겨 단말기 구매 부담 없이 할인된 요금으로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 중도해지가 무조건 이익인 만큼 이탈자 규모가 500만명을 훌쩍 넘을 수도 있다. 혜택을 못 보거나 덜 보는 이용자들이 불만을 제기할 경우 비용이 추가 투입돼야 한다. 자칫 기업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위약금 면제와 같은 극단적이고 성급한 대응이 아니라 명확한 피해 사실 확인과 철저한 재발 방지 대책 수립이다. 소비자와 기업, 전체 시장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접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