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3 15:14:08
(5) 제조업 공동화 심각…‘국내 투자=이득’ 공식 생태계 단위 리쇼어링 전략 필요하다
439만7000명(통계청·4월 고용동향). 이는 지난 4월 국내 제조업 취업자 수다. 제조업 취업자 수는 지난해 4월보다 12만4000명 줄었다. 2019년 2월 이후 6년 2개월 만에 최대 감소폭이다. 제조업 취업자 감소는 지난해 7월부터 10개월 내리 이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의 근간인 제조업 경쟁력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수출 증가세에도 제조업 일자리는 끝 모를 감소세가 이어진다. 미국과 중국발 공동화 등 외부 요인과 규제를 비롯한 역(逆)인센티브 구조 등 내부 요인이 맞물려 제조업 공동화(Industrial Hollow-Out)가 고착화한 결과로 풀이된다.
주기적으로 반복됐던 이슈지만, 최근 수년간 그 강도와 파급력이 심화하고 있다는 게 다수 전문가 진단이다. 제조업 공동화는 중장기적으로 산업 공동자산 붕괴(Industrial Commons)를 초래하고 고용, 내수·투자, 외환 시장 등에 연쇄 악영향을 끼칠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다. 주요 대선 주자가 ‘한국형 마더팩토리(Mother Factory)’ 전략(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이나 규제 없는 ‘메가 프리존’ 공약(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등을 앞다퉈 들고나온 것도 제조업 공동화에 따른 국가 경쟁력 훼손을 우려한 판단 때문으로 분석된다.
K제조업, 줄줄이 해외로
대내외 요인 공동화 가속
K제조업 탈한국의 우선적인 이유는 미국과 중국 등 외부 요인이다.
미국은 경제 안보 차원에서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신공급망 구축에 나서면서 ‘당근(IRA·CHIPS법 등)’과 ‘채찍(관세 부과)’을 앞세워 국내 제조업 공동화를 가속화한다. 2028년까지 미국에 총 210억달러(약 31조원)를 투자하는 현대차그룹뿐 아니라, 앞서 조 바이든 행정부 때도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시설 투자가 줄줄이 해외에서 이뤄졌다. 중국 역시 전통 산업에서 자국 공급 과잉 물량을 저가에 전 세계로 밀어낸다. 손익분기점이 무너진 우리 기업은 생산기지 다변화를 명분으로 줄줄이 인도·동남아 등으로 거점을 옮기는 중이다.
개별 기업 입장에선 해외 현지 생산이 수익성 방어를 위한 최적 선택이지만, 국민 경제 관점에선 다르다. 가령, 관세 직격탄을 우려한 현대차그룹은 향후 미국 내 연간 120만대 생산이 목표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미국에 170만대를 판매했는데, 이 가운데 100만대는 한국 생산 물량이다. 미국 내 연간 생산량이 120만대로 늘면 한국 생산량은 급감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제조업 공동화는 생산 → 소득 → 소비 → 투자라는 경제 선순환 고리 붕괴를 가속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외부 요인뿐 아니라 내부 요인도 산적해 있다. 숱하게 입길에 올랐던 ‘역인센티브’ 구조가 주요 요인이다. 법과 제도, 정책이 없으면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포지티브 규제, 경직된 노동 환경이 고질적인 병폐로 지목된다. 기업 유치를 위해 법인세 인하나 규제 완화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다른 국가와 달리 한국은 각종 규제로 기업 발목이 잡히는 환경이다. 경직된 노동 환경이 첫손에 꼽힌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외 요인도 있지만 제조업 공동화의 주된 요인 중 하나는 강성 노조와 고용 경직성”이라고 설명했다.
제조업 공동화는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 무엇보다 국내 설비투자 감소에 따른 ‘투자 역조’ 심화가 손꼽힌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제조업 해외 투자 증가율이 국내 설비투자 증가율 2배를 넘어간다. 국내 설비투자는 2009년 99조7000억원에서 2018년 156조6000억원으로 연평균 5.1% 증가한 반면, 이 기간 제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51억8000만달러에서 163억6000만달러로 연평균 13.6% 늘어 국내 설비투자 증가율의 2.7배에 달한다.
특히 한국 경제 잠재성장률 하락을 가속화할 가능성을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잠재성장률은 한국 경제가 현재 생산성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물가를 자극하지 않고 달성 가능한 성장률을 뜻한다. 최근 KDI는 한국 경제 잠재성장률이 2040년 0%로 추락하고 2040년대 후반부턴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칠 것으로 경고했다. 3년 전 KDI는 성장률 0% 시점을 2050년으로 예상했는데 10년이나 앞당겨졌다.
국내 설비투자보다 해외 투자가 많은 ‘투자 역조’ 고착화 땐 한국 경제 잠재성장률은 악화 일로를 걸을 공산이 높다. 잠재성장률은 노동증가율, 자본증가율, 총요소생산성(TFP) 등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국내 설비투자는 자본 축적(Capital Accumulation)의 핵심 요인이다. 국내 설비투자가 줄면, 자본 축적이 정체되거나 줄어 잠재성장률 하향 조정이 불가피하다. 해외 투자는 타국에 자본이 축적되므로, 한국 GDP에 기여하지 않는다.
제조업 공동화 고착화 땐 TFP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다. 노동과 자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잔여 성장분이 TFP이다. 여기엔 조직 효율, 제도적 환경, 혁신 전환·흡수력 등이 포함되며 일반적으로 기술 진보로 해석된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TFP는 대체로 3% 안팎 증가율을 유지해왔으나 2011년부터 1% 내외로 추락했다. 생산기지 해외 이전 → 국내 생산시설 노후화 → 신기술 도입 지연 → 국내 생산성 저하로 이어진다는 게 전문가 지적이다.
대선 주자, 제조업 위기 한목소리
정책 각론엔 다른 시각 담겨
6·3 대선을 앞두고 주요 대선 주자가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한목소리로 외치는 것엔 이런 우려가 깔려 있다. 후보마다 각론엔 차이가 있다. 정책만 놓고 보면 김문수 후보보단 이재명 후보가 제조업 공동화 우려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했다는 평가다. 다만 제조업 공동화를 통합적 관점에서 정책 패키지로 접근하기보단 각론 수준에서 개별 정책을 내놓는 수준에 그쳐 아쉽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재명 후보는 ‘한국형 마더팩토리’ 전략을 강조한다. 마더팩토리는 거점 생산기지 간 연결성을 높여 통합하는 허브 역할을 한다. 이 대표는 “기업 매출 증가가 국내 재투자·고용·임금 인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국내 공급망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형 마더팩토리’ 전략이 필요하다”면서 “이를 거점으로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지원하고 산학 협력 등 혁신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후보는 ‘한국판 인플레이션감축법(IRA)’도 들고나왔다. 그가 2월 현대자동차 간담회에서 처음 언급한 국내 생산세액공제는 제조 기업의 국내 생산 유인을 늘려 제조업 공동화를 막는 방안이다. 이 후보는 “반도체 경쟁력 확대를 위해 국가 차원의 지원과 투자가 필수”라며 “국내에서 생산 판매되는 반도체에는 최대 10% 생산세액공제를 적용해 반도체 기업에 힘을 싣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당 의원 입법도 추진한다. 이언주 민주당 최고위원은 방산·철강·배터리·반도체 등 주력 산업을 국가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주력 산업의 고부가가치 전환 및 경쟁력 강화 지원 특별법(주력 산업 공동화 방지법)’ 발의를 추진 중이다. 이 의원은 미래경제성장전략위원회 위원장 겸 이재명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문수 후보는 규제 완화와 세금 감면에 무게를 싣는다. 규제를 풀고 세금을 감면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게 핵심 공약이다. 김 후보 측은 “기존 규제 관련 특구를 통폐합해 ‘메가 프리존’으로 개편하고 해외 수준으로 규제를 낮추는 규제 기준 국가 제도를 시행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각종 규제를 상시 관리·감독하는 ‘규제혁신처’를 신설해 국내 기업의 해외 이탈을 최소화하겠다는 복안도 내놨다. 유연근무 요건도 완화 등 노동 환경 개선도 주요 공약이다.
문제는 실행
골든타임 ‘촌각’ 다퉈
우리 경제 구조 개혁이 갈급한 과제지만, 문제는 실행이다. 기업 혁신·노동 시장 유연화 같은 구조 개혁은 이해관계 조율에 난항을 겪다 번번이 좌절됐다. 한국이 지난 수십년 IT 고도화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음에도 TFP가 추락한 것은 구조 개혁 지체로 영역 간 혁신 확산에 제동이 걸린 결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제조업 정책의 접근법부터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지금처럼 개별 기업 단위로 ‘리쇼어링(해외 기업 국내 복귀)’ 정책을 펼 게 아니라 산업 생태계 단위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게리 피사노 하버드대 교수 등이 강조한 ‘산업 공동자산’은 산업 기반이 와해될 경우 혁신 역량도 함께 상실된다는 경고를 담았다. 산업 공동자산은 국가와 지역이 보유한 산업 생태계 전반의 기술, 노하우, 인력, 공급망 등 역량의 총합을 뜻한다. 피사노 교수는 “생산 현장, 엔지니어링, 숙련 노동, 협력 업체, 대학·연구소 등이 지역, 국가 내에 함께 있어야 학습과 혁신의 선순환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춰 국내 지원책 역시 개별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세제 감면 정도에 그칠 게 아니라 전후방 산업이 집적돼 클러스터를 이룰 수 있도록 정책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개별 기업 단위가 아닌 생태계 단위 리쇼어링을 추진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 정부가 보조금을 강력하게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내 생산기지를 ‘마더팩토리’로 고도화하는 데 속도를 내야 한다는 주장도 꾸준히 나온다. 마더팩토리는 해외 거점 생산기지의 기술 기준과 품질·공정 표준을 제시하는 ‘두뇌’ 역할을 맡는다. 예컨대, 한국 본사 또는 국내 공장이 연구개발(R&D), 초기 양산, 품질 표준 등을 담당하고 해외 공장은 그 기준에 맞춰 대량생산 기능을 맡는 식이다. 국내 마더팩토리는 기술 집약적 공정, 첨단 장비, 표준 설계 능력 등에 주력해 고비용 구조 아래서도 고부가가치 첨단기지로 국내 존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이를 통해 R&D-생산-공급망으로 이어지는 산업 공동자산 고도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남상욱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국내 공장은 글로벌 생산기지 가운데 중심축 역할을 하는 ‘마더팩토리’로서 역할을 강화하고 R&D 중심 체계로 대전환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고급 인력을 적기에 공급할 수 있는 인프라 조성도 숙제다. 국내 제조 업계는 고급 엔지니어 부족과 청년층 제조업 기피라는 이중 난관에 직면해 있다. 김용진 교수는 “제조업 AI 전환 정책 지원,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통한 외국인 투자 활성화, 외국인 노동력 확보 관련 정책이 필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1호 (2025.05.28~2025.06.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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