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3 15:08:55
표류하는 7조8000억원 KDDX 사업
국비 7조8000억원이 투입되는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건조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년 전에 사업자 선정을 끝내고 함정 제작에 착수했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사업자 선정을 두고 업체 간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은 탓에 선정이 계속 연기됐다. 갈등을 중재하고 사업자를 선정해야 할 방위사업청(방사청)은 사실상 방관 중이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까지 개입을 선언하면서 상황은 더욱 미궁에 빠져들었다. 설상가상 5월에는 방사청에서 KDDX 사업을 도맡아온 담당자가 석연찮은 이유로 전역 지원서를 냈다. 방산 업계서는 현재 상태가 지속되면 건조 목표 시점인 2030년까지 함정을 완성하기 힘들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KDDX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양 사 갈등에 정치권 개입까지
KDDX 사업은 배 선체부터 전투 체계, 레이더 등 무장을 국내 기술로 만드는 국산 구축함 사업이다. 6000t급 미니 이지스함 6척을 건조한다. 사업비는 총 7조8000억원에 달한다. 사업은 총 개념설계 → 기본설계 →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 후속함 건조 순으로 이뤄진다. 개념설계는 2012년 당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기본설계는 2020년 현대중공업(현 HD현대중공업)이 수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자 선정을 두고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양 사 간 갈등이 촉발됐다. 초창기 방산당국은 방위사업관리규정 89조 2항을 근거로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를 현대중공업과의 수의계약으로 진행하려 했다. 일반적으로 해당 법령과 관행에 따라 기본설계를 담당한 회사가 상세설계, 선도함 건조까지 맡는다.
HD현대중공업 직원들이 군사 기밀 탈취, 유포 혐의로 유죄를 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HD현대중공업 직원 9명은 군사 기밀 탐지·수집, 누설로 인한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2023년 11월 유죄가 최종 확정됐다. 모두 징역 1~2년, 집행유예 2~3년을 선고받았다.
유죄 판정에도 방사청은 HD현대중공업의 입찰참가 자격을 유지했다. 청렴서약 위반의 전제가 되는 대표나 임원의 불법 개입이 확인되지 않아서다. 이에 한화오션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군기법 위반을 저지른 회사가 사업을 가져간다는 게 적절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2024년 3월 4일 한화오션이 HD현대중공업 임원을 군사기밀보호법(군기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HD현대중공업도 맞고소에 나서며 상황은 격화됐다. 이후 2024년 연말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의 교감 이후 양 사는 고소를 취하하며 분쟁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임시 휴전에 불과했다. 사업자 선정을 두고 두 회사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해가 바뀐 2025년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양용모 해군참모총장이 직접 나서 조속한 합의와 중재를 요청했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주관기관인 방사청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갈등에 불을 질렀다. 2024년 양 사가 고소전까지 치달을 때는 제대로 중재하지 않으며 방관했다. 2025년, 현장에서 KDDX의 빠른 진행을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급하게 사업 추진을 시작했다. 이때는 방관하던 과거와 달리 수의계약 방식을 밀어붙이며 논란을 자초했다.
사업 주관 부서인 방사청 함정사업부는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 방식을 수의계약으로 4월 안에 진행하려 했다. 방사청이 급작스럽게 사업을 밀어붙이자 이번에는 사업자 선정에 참여하는 외부 민간위원들이 반발했다. 민간위원들은 사안이 큰 만큼 신중히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민간위원 반대가 거세지자 직접 설득에 나설 정도로 수의계약 방식을 강조했다. 4월 사업분과위원회와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안건을 통과시키는 방안을 강행했다.
방사청 고집은 분과위를 앞두고 좌절됐다. 정치권이 끼어든 탓이다. 더불어민주당 진영에서 방사청을 향해 강한 경고 메시지가 나왔다. 부승찬 민주당 의원은 “국방부가 4월 내로 특정 업체와의 수의계약을 통해 이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얘기가 들려온다”며 “국방부가 합리적 근거 없이 특정 업체와 수의계약을 추진한다는 것은 방산 비리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감사원 감사 청구 법적, 행정적 모든 조치를 취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정치권 압박에 KDDX 사업자 선정 안건은 분과위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5월 들어서는 사업을 주관하던 신현승 함정사업부장(해군 준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신 부장은 5월 원 소속 부대인 해군에 전역 지원서를 제출했다. 신 부장 공식 임기는 2026년 5월까지다. 임기를 1년 앞두고 그만둔 것. 신 부장 사퇴를 두고 업계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경고에 부담을 느껴 나간 것이란 추측부터, 핵심 사업인 KDDX 사업이 진전이 없는 상황 속에서 굳이 자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 나갔다는 예측이 쏟아진다. 다만 전역서를 낸 배경에 대해 확실히 확인된 사실은 없다.
담당자마저 사퇴하면서 KDDX는 사실상 방향을 잃었다. 모든 사항이 ‘올스톱’된 상황이다. 첨단 군함이 시급한 해군은 애를 태우고 있지만, 좀처럼 진척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 업계 관계자는 “대선 이후, 새 정권이 들어오고 정부 조직이 재정비되고 나면 비로소 KDDX 상세설계 사업자 선정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 시원하게 해결 못하나
명분은 한화 실리는 현대…‘깡치’
기업에 휘둘려 제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방사청 행보를 두고 방산 업계에선 불만과 의문이 쏟아진다. 이번처럼 방사청이 역으로 기업 눈치를 보는 상황이 이례적인 탓이다. 그동안 방사청은 ‘갑’의 존재였다. 정부가 손님인 방산업 특성상, 기업들은 주무 부처인 방사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다른 사업과 달리 이번에는 왜 방사청이 사태를 제대로 중재하지 못하고 있을까. 현장에선 KDDX 사업이 누구 편을 들기 힘든 ‘깡치’인 탓이 크다고 내다본다. 깡치란 사실·이해관계가 복잡하고 당사자 주장이 엇갈려 내용 파악이 어려운 사건을 뜻하는 법률계 은어다.
KDDX 사업을 둘러싼 양측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다. 명분은 한화가 앞선다. HD현대중공업이 군기법 위반으로 보안 벌점을 받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한화오션 주장대로, 군기법을 위반한 회사에 책임을 묻지 않고 수의계약을 바로 진행하는 것은 무리다. 반면 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HD현대중공업 주장도 무시하기 힘들다. 방사청 출범 후 상세설계는 기본설계를 담당한 회사가 맡는 게 관례였다. 또 기본설계를 맡지 않은 업체가 상세설계를 맡으면 사업을 파악해야 할 시간이 필요해 사업이 연기될 우려가 있다. 이미 지체가 많이 된 상황에서 빠르게 배를 건조할 수 있는 회사가 맡는 것이 유리한 게 사실이다.
방산 업계 관계자는 “기존 방위사업청의 사업자 선정 방식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순수하게 무기를 만드는 실력이 좋은 회사가 사업을 맡을 수 있도록 절차를 개선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비슷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진욱 기자 ban.jinuk@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1호 (2025.05.28~2025.06.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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