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4.16 18:00:00
“장미에 떨어진 빗방울과 아이고양이의 수염, 빛나는 주전자와 따뜻한 벙어리장갑, 끈으로 묶어둔 갈색의 서류 봉투, 이것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My favorite things) 중 하나야.”
천둥 번개가 치는 밤, 무서워 하는 일곱 아이들이 가정교사 마리아의 방으로 달려 들어간다. 다정하고 쾌활한 마리아 선생님은 자신의 침대에 아이들을 앉히고 무섭거나 슬플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려보라고 하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My Favorite Things)’이라는 노래를 불러준다. 아이들은 금세 이 노래에 빠져들고, 무서움을 잊게 된다. 고전 영화 사운드오브 뮤직의 한 장면으로,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중 하나다.
이 영화속 장면과 노래를 떠올린 것은 오랫만에 ‘My Favorite things’라는 글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서 아이들의 학교 입학 절차를 밟고 반 배정을 받았을 때다. 담임 선생님의 개인 인터넷 페이지를 이메일로 공유를 받았는데, 여기에서는 매주 아이들의 담임선생님이 올리는 뉴스레터를 확인할 수 있다. 뉴스레터에는 다음주에 있을 주요 행사와 수업 내용, 학교 공지사항이 매주 업데이트 된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선생님의 사진 옆에 있는 자기소개였다. 친근한 자기 소개에 웃음이 나왔다. 어디에서 태어났고, 현재 어떤 동네에 살고 있으며 아이는 몇명인지, 키우는 강아지의 종류가 무엇인지까지 적혀져있었다. 자기소개를 마친 후에는 대망의 ‘My Favorite Things’ 코너다. 선생님은 자기 소개보다 더 많은 지분을 할애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소개하고 계셨다. 좋아하는 가게, 좋아하는 컬러, 좋아하는 간식 등등이 항목별로 일목 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영화속 마리아 선생님처럼 슬프거나 무서울 때 마다 너희도 나처럼 좋아하는 것들을 정리해봐, 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적어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것들이 적힌 리스트의 맨 마지막에는 선생님의 생일도 쓰여있었다. 그제야 이 목록들이 이곳에 쓰여진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학부모님들, 친구들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을 때 참고하세요’라는 뜻이었구나.
‘교사에게 선물금지’가 당연시되는 한국에서 갓 넘어온 입장에서는 이런 선생님들의 위시리스트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청탁금지법으로 인해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선물을 드릴 수가 없다. 학생에 대한 평가와 지도를 상시적으로 담당하는 담임교사 및 교과 담당교사와 학생(학부모) 사이의 선물은 가액 기준인 5만원 이하라도 원활한 직무수행, 사교, 이례 목적을 벗어나므로 금품 등 수수 금지 예외사유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학부모 면담 시간에도 간단한 음료와 쿠키 조차 사오면 안된다는 학교의 공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미국이고, 선생님들에게 선물을 통해 감사를 표시하는게 너무나도 합법인 나라였다. 선생님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스승의 날 등 특별한 기념일에는 아이를 통해 선물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선물은 보통 기프트카드다. 선생님이 친절히 알려주신 가장 좋아하는 가게(Favorite store)의 기프트 카드를 20달러에서 50달러 정도 충전해 영수증과 함께 아이들을 통해 보낸다. ‘대놓고 촌지를 요구하는 것 같다’는 불편한 시선도 있고, 처음에는 나 역시 생소한 문화에 부담을 느꼈다. 하지만 선물은 강제가 아니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있을 때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꽤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과거 촌지문화 처럼 선생님이 선물을 준 친구와 주지 않은 친구를 대놓고 차별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학부모 면담 시간이 정해졌을 때 나는 선생님이 좋아하는 항목을 펼쳐보았다. 초콜렛, 무가당 캔디 등 선생님이 즐겨먹는다고 언급한 간식들을 작은 선물용 쇼핑백에 담아 학교에 방문했다. 선생님은 ‘내가 수업시간에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아플때마다 이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데, 어떻게 알고 이렇게 내 마음에 꼭 드는 간식들을 사다주셨냐’며 격한 감사 인사를 하셨다. 물론 선생님이 써놓으셨기 때문에 안 것이긴 하지만, 내가 그 항목을 읽고 선물을 챙겨온 것에 대해 이렇게 진심으로 고마워해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후 이어진 학부모 상담 시간에 선생님이 우리 아이의 교우 관계, 학교생활, 학습 태도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오히려 새로 전학 온 외국인 아이에게 마음을 쏟아주는 선생님에게 깊은 감사함이 우러나왔다. 부족한 영어 때문에 선생님이 내게 해준 감사인사보다 한참 못미치는 감사인사를 할 수 밖에 없어 안타깝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커피숍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프트카드를 충전해 보냈는데, 선생님에게 카드가 왔다. 너희 가족이 보내준 기프트 카드가 참 유용했고, 나는 그 카드를 통해 베지테리언 샌드위치와 디카페인 커피를 맛있게 먹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마음을 써 줘서 정말 고맙다는 마무리도 잊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생일을 맞은 동료나 친구들에게 선물을 보내면 고맙다는 메시지를 받곤 한다. 하지만 손글씨로 네가 준 선물을 잘 사용해서 고마울 뿐 아니라 이 선물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까지 구체적으로 적은 편지를 보니 마음이 뭉클했다. 선물을 받는 데 거리낌이 없고,이 선물에 마음껏 감사를 표현하는 미국 학교 내 선물 문화가 어색하면서도 싫지만은 않았다.
문득 한국에서 큰 아이의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 이외에는 어떤 감사의 선물도 드리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의 학교 생활에 큰 나무가 되어주었던 선생님께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받을 수 없다며 만류하셨다. 대신 반 친구들에게 함께 해줘서 고맙고 1년 후 돌아와서도 즐겁게 지내자는 의미로 간식과 조그마한 선물을 나눠주는 것은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반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었다. 아이들의 열쇠고리를 사면서 선생님을 위한 선물을 준비할 수 없는게 너무 아쉬웠다. 마지막 등교일에 선생님은 친구들과 함께 쓴 편지를 모아 아이에게 주셨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쳐주시는 스승의 값없는 은혜가 참 잊혀지지 않는다.
본질의 의미가 훼손되지만 않는다면,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는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한편 선물은 커녕 선생님에게 음료수 한잔도 대접하기 어려워진 한국의 지금을 만든 과거의 촌지 문화가 참으로 씁쓸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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