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말하기 거북한 부탁이 있을 땐 식사하면서 하라." 음식은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거북한 부탁까지 통할 수 있게 하는 게 식사다.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정돈된 형식을 잠시 내려두고, 편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나눌 때 진솔한 대화의 문이 열린다. '디너 위드 MK'는 맛있는 인터뷰를 추구한다. 저명 인사들의 맛집에서 음식을 사이에 두고, 그들의 속마음과 인생 이야기를 쫄깃하게 파고들 것이다.
1990년 가을, 따스했던 오후.
중1 딸을 태운 아빠의 차가 골프연습장 앞에 멈춰선다. 홀로 차에서 내린 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연습장을 향했다. 아빠는 볼 일을 보고 데리러 오겠다며 차를 몰고 사라졌다. 소녀는 열심히 골프채를 휘둘렀다. 그렇게 4시간이 지나도, 5시간이 지나도 아빠는 오지 않았다. 그사이 날이 어둑해졌다. 소녀는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스윙을 무한 반복했다.
"아빠가 일을 보시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집에 내가 없었던거죠. 그때서야 아빠가 '아차' 하신 겁니다. 세리를 연습장에 놔두고 왔지!"
어느덧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멀리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리야, 오래 기다렸지. 너가 여기 있다는 걸 깜박했다."
그로부터 2년 후, 한국 골프 역사를 송두리째 뒤흔든 초대형 사건이 벌어진다.
중학교 3학년이 된 박세리가 프로대회(라일앤스코트 여자오픈)에 초청을 받았다. 갤러리들은 앳된 소녀의 플레이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박세리는 대회 내내 송곳 같은 샷을 날리더니 급기야 당대 최고의 여자 프로골퍼였던 원재숙을 연장 접전 끝에 꺾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한국 골프의 신화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박세리 감독이 뚝도지기 해신탕을 떠주며 밝게 웃고 있다.
이충우 기자
뚝도지기에서의 첫 만남
2025년 1월 21일 저녁, 설 연휴를 앞두고 기자가 찾은 곳은 서울 성수동 뚝도시장. 한때 남대문·동대문과 함께 서울 3대 시장으로 유명했던 재래시장이다. 이곳 한쪽에 자리 잡은 '뚝도지기'.
허름하지만 정감 넘치는 이 작은 식당에서 박세리 감독을 만났다.
"단골집인가요?"(기자)
"알게 된 지 2년 된 거 같아요."(박 감독)
"생각보다 오래된 건 아니네요."(기자)
"용산에서 살다가 여기(성수동)로 이사온 지 3년 됐거든요. 처음 이사 와서 동네 여기저기 산책하다가 발견한 집이죠. 조개탕이 정말 시원해서 먹자마자 반했어요. 게다가 여기 사장님도 반려견을 키우세요. 저도 강아지를 좋아하거든요."(박 감독)
박세리의 '견(犬) 사랑'은 정평이 나 있다. 오죽하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현역 시절,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반려견을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 당시 박세리 곁을 지켰던 녀석은 다부진 체격의 '비글'이었다. 지금도 박세리는 강아지 6마리와 살고 있다.
이날 박 감독이 주문한 음식은 해신탕이다. 바다의 신 '용왕님'이 즐겨 먹었다는 보양식이다.
"이 집은 조개탕이 유명한데, 해신탕도 진짜 맛있어요. 오늘 몸보신 제대로 한번 해보시죠."(박 감독)
해신탕은 닭과 해산물, 각종 한방재료가 어우러진 음식이다. 중국에 '불도장'이 있다면 한국에는 '해신탕'이 있다.
드디어 뚝도지기 해신탕이 식탁에 올라왔다. 웅장한 토종닭 한 마리와 가리비, 전복, 새우가 시선을 압도한다. 펄펄 끓는 한방 육수에 산낙지를 넣자 수많은 낙지 다리가 주변 식재료를 거칠게 휘감는다.
박 감독이 손수 떠준 해신탕을 맛볼 차례다. 쫄깃한 토종닭에 바다 내음 가득한 가리비의 조합이 환상적이다. 여기에 깊고 진한 국물맛, 그야말로 말문이 막힌다.
몇 분간 대화가 끊겼다. 머리에선 굵은 땀방울 하나가 이마를 타고 쪼르륵 흘러내린다. 본업을 망각하면 안되겠다 싶어 먹는 도중 질문을 던졌다.
"최근에 우리나라가 많이 어렵잖아요? 박 감독님은 본인 자체가 대한민국 희망의 아이콘인 거 알고 계시죠?"
박 감독도 순간 음식에 빠졌었나 보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힘들었던 시기, US오픈에서 우승했던 순간을 국민들이 기억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고 답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로 휘청이던 시절, 신발을 벗고 연못(워터 해저드)에 들어가 어프로치를 하던 그녀의 모습, 그 직후 메이저 우승컵을 힘차게 들어올리던 장면을 우리 국민들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박세리로 인해 수많은 국민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맨발의 투혼을 목격한 국민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1998년 7월 US오픈이 열렸던 곳은 미국 위스콘신주 블랙울프런 골프장이었죠? 당시 연장전에서 왜 연못에 들어갈 생각을 했을까요? 물론 공이 해저드 근처 러프에 걸려 있긴 했지만, 약간은 무모해 보였거든요."(기자)
"나는 경험을 정말 중시하는데, 당시에도 딱 그런 마음이었어요. 생각을 실행에 옮겨보고 싶은 열망이 강렬하게 일어났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일단 해보고 싶었던 거죠. 그런 열망이 최고의 샷을 만들어 냈어요. 그때 성공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비슷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극단의 리스크를 지기보다는 안전하고 평범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박 감독)
이후 그녀는 승승장구했다. 마침내 2004년 5월 미켈롭 울트라 오픈 우승컵을 거머쥔 박세리는 한국인 최초로 LPGA 명예의 전당 입회 자격을 획득했다. 최고의 영예를 얻었지만, 그 이후 예상치 못한 슬럼프가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장기인 드라이버샷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빗나가기 일쑤였다. 아이언샷을 할 때도, 퍼팅을 할 때도 급격히 자신감이 떨어졌다. 2005년 박세리의 상금 랭킹(102위)은 충격적이었다.
"수많은 위기를 겪었을 텐데, 어떻게 이겨냈나요?"(기자)
"슬럼프가 왔을 때,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면 절대 안 돼요. 위기나 슬럼프는 인위적으로 극복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것이라고 봐요. 어려움이 찾아올 땐 그 시점까지 걸어왔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게 좋지, 억지로 해법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고 조급해하다 보면 오히려 미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모든 위기는 결국 지나간다는 생각으로,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박 감독)
2005년 나락까지 떨어졌던 박세리는 2006년 6월 화려하게 부활했다. 호주의 대스타 카리 웹과 연장 접전을 펼친 끝에 2년 만에 우승컵을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꿈꾸는 메이저 트로피(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였다.
"세계 최고의 무대를 무려 19년이나 누볐습니다. 두려웠던 순간이 많았을 거 같은데요."(기자)
"딱히 없었던 거 같아요."(박 감독)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기자)
"특별한 건 아니지만, 확실한 방법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을 갖는 겁니다. 나는 자기에게 자신이 없는 사람은 잘 믿지 못해요. 신뢰가 안가요. 어느 분야든 처음부터 잘할 순 없기 때문에 실수하거나 못하는 걸 창피해할 필요가 없거든요. 중요한 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자신감이에요. 그거 하나로 19년을 버텼죠."(박 감독)
문득 가장 기억에 남는 골프장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처음 US오픈 우승했던 블랙울프런이죠. 그 코스는 어렵기도 하지만 정말 도전하고픈 열망이 솟구치는 곳이에요."(박 감독)
"안 좋아하는 골프장은요?"(기자)
"영국의 서닝데일 올드 코스요. 데뷔 초창기에 그곳에서 열린 대회에 몇 번 나갔는데 날씨도 으슬으슬 춥고 그곳만 다녀오면 이상하게 잔부상도 많이 생겨서, 앞으로는 참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01년 그곳에서 열린 브리티시오픈이 하필이면 처음 메이저 대회로 승격된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참가를 했는데, 제가 덜컥 우승을 했지 뭐예요."(박 감독)
박세리는 요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듯 보인다. 지상파는 물론 각종 종편을 통해 인기 방송인으로 거듭났다. 먹방·반려견·토크쇼·일상 예능 등 분야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녀가 준비하는 진짜 '제2의 인생'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이다.
"US오픈 우승이 워낙 강렬하긴 했지만, 많은 분들이 저를 오랜 기간 기억해주시는 건 후배들 덕분인 거 같아요. 흔히 '세리키즈'라고들 하죠? 박인비·신지애·김효주 등등 사랑스러운 후배들이 훌륭하게 활약해주니까 나까지 덩달아 기억해주는 거 아닐까 싶어요.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건 팬들이에요. 나를 아껴주신 국민들이 즐겁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는 4월 박세리는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있다. 용인시와 함께 만든 'SERI PAK with 용인'이 문을 여는 것이다. 세상에 없던 신개념 스포츠문화 공간을 추구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부모들에게 다양한 체험시설과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 용인의 각급 학교와 연결해 강의 콘텐츠를 만들고 인재를 발굴해 장학금도 지원한다. 박세리 역시 직접 강의에 참여한다.
"인재 발굴은 일단 골프에서 시작하지만 여러 종목으로 넓힐 계획입니다. 용인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대할 생각도 있고요.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만큼,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드리는 일에 진심을 다하고 싶습니다."
△1977년 9월 출생, 대전 갈마중, 공주 금성여고, 숙명여대 졸업 △1998년 LPGA 진출 후 통산 25승 △2007년 6월 LPGA 명예의 전당 입회 △2016 리우올림픽·2020 도쿄올림픽 여자골프 대표팀 감독 △2024년 한국 여성 최초 밴플리트상 수상
박세리가 픽한 해신탕은닭과 해산물, 각종 한방 재료가 어우러진 보양식이다. 닭과 해산물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다. 닭은 단백질이 풍부하면서도 지방과 탄수화물이 적어 대표적 건강식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닭엔 미네랄과 칼슘이 부족하다. 이 부족한 영양소를 전복과 새우가 채워준다. 여기에 타우린이 풍부한 낙지까지 가세해 최고의 맛과 영양분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