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2.03 18:00:00
어느 날 저녁, 당신은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친한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즐기는 자리를 갖습니다. 좋은 날(어쩌면 승진 혹은 기념일)이었기에, 크게 한턱 내면서 근사한 와인을 곁들일 계획이었죠. 약속 시간에 맞춰 등장해 코트를 맡기고, 먼저 온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큰 마음을 먹고 제법 비싼 와인을 주문합니다. 비싼만큼 와인이 맛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윽고 소믈리에가 테이블에 당신이 주문한 와인을 가져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하게 절제된 손놀림으로 코르크를 열고, 와인잔에 소량을 부어 당신에게 내밉니다. 테스트 해보라는 뜻인 것 정도는 이미 사전에 공부해놨던 당신, 자연스레 와인잔을 코에 접근시켜 향기를 확인하려고 흡입합니다.
그 순간 비강을 간질이는 것은 기대한 것 이상의 매혹적인 향기…가 아닌 침수된 지하실 같은 냄새였고, 당신은 속으로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지?’라며 놀랍니다. 언젠가 마셔본 샤블리에서 날 법한 레몬이나 바다내음도, 피노누아에서 날 법한 싱그러운 장미향도 아닌 이상한 냄새죠.
순간 당신의 머릿속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이 냄새는 뭐지?’ ‘15만원 짜리 와인에서 이런 냄새가 나는 게 맞나?’ ‘혹시 상한 건가?’ ‘상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마음 속에 순식간에 여러 고민과 불안이 엄습하고, 소믈리에와 친구들은 당신을 응시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는지 머릿속을 헤집어 보지만, 이런 경우에 대한 대비는 계획에 없었기에 어쩔 줄 몰라합니다.
와인을 즐기다 보면 한번쯤은 경험하게 되는, 폴트(fault) 와인을 접하는 상황입니다. 폴트 와인은 변질된(상한) 와인을 말합니다. 불어로는 부쇼네(Bouchonne), 영어로는 콜키(Corky)라는 단어로 통칭하기도 합니다만 부쇼네와 콜키는 폴트의 한 종류입니다.
경험이 없다면 부쇼네 와인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게 부쇼네라고 어떻게 확신하느냐’ 입니다. 그리고 ‘부쇼네일 경우 뭐라고 말해야 하느냐’죠. ‘부쇼네 같다’고 먼저 말하기도 어렵고, 막상 그렇게 용기를 내 말했더라도 부쇼네가 아니라면 그만큼 쪽팔린 일도 없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용기를 갖고 편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와인의 폴트는 생각보다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고, 아무리 전문가더라도 외관만 보고 모든 변수를 예상할 수 없습니다. 만약 와인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거나 상태가 나쁘다고 느껴진다면, 반드시 소믈리에에게 물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우선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은 과학이 발달한 2025년 지금도 와인이 상하는 일은 꽤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스크류 캡의 보급과 양조 기술 공장보다 와인의 열화가 거의 없어졌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는 꽤나 과장된 이야기라는 게 업계 전반의 중론 입니다.
물론 확실히 스크류 캡은 코르크에 비해 산소 투과성(와인이 숙성하기 위해 중요한 요소)이 부족하지만, 코르크 마개가 상해 와인이 변질되는 상황은 없다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부쇼네를 뜻하는 영어 단어 콜키의 어원이 코르크 냄새라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코르크 마개가 없다면 콜키가 발생할 수가 없다는 논리죠.
그러나 와인이 상하는 변수가 오로지 코르크에서만 발생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보관 컨디션에 따라 얼마든지 변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간 문제로 라디에이터 근처에 와인을 박스채 쌓아놓고 판매하는 음식점, 오랜 기간 세워서 진열해놓고 판매하는 와인샵, 아예 바깥 길거리에 진열하고 파는 편의점 등에서 판매된 와인은 변질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와인은 따뜻한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세워서만 보관하면 마개인 코르크가 말라 코르크와 병 사이 보이지 않는 틈으로 공기가 들어가 산화될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 진열해 놓는 것은 온도와 직사광선 등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변질된 와인의 맛은 한번 경험하면 잊혀지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게 앞서 말한 부쇼네 입니다. 비에 젖은 골판지나 신문지의 맛이 나는 것은 물론, 프레스로 찍어누른 듯한 억눌리고 납작해진 맛이 납니다. 와인을 즐기는 재미 중 하나인 여운도 거의 없다시피하죠.
다만 조심해야할 점은, 부쇼네 와인을 마시면서도 ‘원래 이런 맛’이라고 오해해 마시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점입니다. 와인에서 습한 지하실과 같은 뉘앙스가 풍기거나, 마치 갓 가공된 가죽, 쥐 냄새 같이 지나치게 야성적인(원초적인) 맛과 향기가 있다면 경험 유무와 상관 없이 업장의 소믈리에에게 물어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특히 쥐 냄새(Mouse taint나 puppy breath라고도 불림) 현상은, 썩은 포도에서 유래하는 세균 감염이 원인입니다. 와인 숙성과 셀러링 과정에서 이산화황(SO2)이 부족해 더더욱 악화됩니다. 최근 유행했던 내츄럴 와인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결함이기도 합니다.
쥐 냄새는 일반적으로 와인을 마신 후 맛으로 느껴집니다. 마신 사람의 타액이 pH를 상승시켜 역류적으로 향기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쥐 냄새의 과학적인 해명은 아직 진행중이지만, 이 냄새에 대한 관용도는 개인차가 있습니다.
마굿간 냄새로 통칭되는 브레타노미세스(Brettanomyces·줄여서 브렛이라고 부르기도 함)라는 부패효모와 마찬가지로 민감한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상하다’라고 느끼는 당신의 후각과 미각입니다. 낮은 수준의 브렛(Bret)은 와인에 복잡성을 더할 수도 있습니다만, 브렛이 생성하는 화학 화합물이 강해지면 가죽 안장이나 목장, 의료용 테이프와 같은 냄새가 과잉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 밖에도 와인의 폴트에는 다양한 것이 있지만, 그 중에는 실제로는 폴트로 보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와인 코르크를 오픈했을때 우리는 때때로 코르크에 수정 같은 결정체가 맺혀있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타르타르산 모노칼륨인데요. 오랫동안 차가운 상태로 보관된 화이트 와인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인체에 무해하고, 향과 맛도 없는 수준에 가깝습니다.
청징 기술의 발달로 한때 탁한 와인은 금기처럼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내츄럴 와인이 대두됨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 바뀌고 있습니다. 요즘 등장하는 와인에서 발견되는 탁함은 오히려 풍부한 맛과 향을 보증하기도 합니다.
또한 특정 빈티지에 지역에서 발생한 환경 재해가 폴트 와인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캘리포니아나 호주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불이 대표적입니다. 산불의 연기가 포도밭에 큰 영향을 주어, 그 결과 와인에서 불쾌한 탄내가 나타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2004년 부르고뉴의 피노누아에서 종종 느낄 수 있는 파릇파릇한 풀의 냄새와 미숙한 풍미는 대량 발생한 무당벌레가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무당벌레는 포도 열매의 압착 과정에서 풀내음과 같은 풍미를 가져오는 화학물질을 방출한다는 게 뒤늦게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와인에서 썩은 계란이나 하수구, 쥐 냄새, 혹은 본래는 샤도네이 베이스의 부르고뉴 블랑인데 셰리와 같은 향기를 내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코 때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와인은 마개를 열어보기 전까지 육안 만으로 변질 여부를 정확히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와인을 판매하는 매장도 이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물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