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대회가 진행되면서 한 ‘무명선수’가 현장의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그 선수는 조별예선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조재형을 꺾으며 파란을 일으키더니, 강호들을 줄줄이 누르고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에선 ‘부산의 고수’ 김평준마저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현장에선 “도대체 저 선수는 누구냐?”고 술렁였다.
그가 바로 ‘한국프로당구 최강전’ 초대 챔피언 김무순(63‧서울연맹)이다.
이듬해인 1987년, 김무순은 서울 여의도백화점에서 열린 ‘제2회 한국프로당구 최강전’에서 타이틀 방어에 성공, 당구선수로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선 4위에 오르기도.
2000년대도 수많은 트로피를 수집하며 한국의 ‘역대급 당구선수’로 꼽히는 김무순. 동시에 현재 30~40대 선수들의 ‘멘토’ 역할도 해냈다. 90년대 중반부터 그에게 한수 배우기 위해 다녀간 현역 선수들만 60여명이 넘는다. 또한 온라인을 통해 동호인들에게 당구규칙, 기술 등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달 초 그의 클럽(서울 은평구)에서 만난 김무순은 “과거의 영광은 과거일 뿐, 나는 아직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현역 당구선수”라고 했다. 그와 30년 넘는 당구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2018 양구 국토정중앙배’ 복식전에서 이홍기(서울연맹)와 팀을 이뤄 결승까지 올랐다. 당시 박광열‧박인수(안양연맹) 팀에게 1점차(30:29)로 패한 후 무척 아쉬워하던데.
=마지막 22이닝째 (이)홍기의 샷이 빗나가면서 우리가 패했다. 그 친구라면 충분히 해낼 만한 공이었는데. 하하. 그만큼 아직도 경기에 나서면 승리가 고프다.
▲마지막 전국대회 우승은 언제인가.
=2010년 3월 ‘제1회 유니버셜코리아 인천오픈’이다(당시 김무순은 결승에서 최성원을 40:38로 꺾고 우승). 이후론 대한당구연맹 이사직을 맡아 전국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당시 대한당구연맹 규정상 임원과 선수 겸직 불가). 경기에 못나가니 죽겠더라. 미치도록 공이 치고싶어 이사직을 내려놓고 올해 초 선수로 복귀했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하다.
▲선수복귀 후 체력운동도 하고 있다고.
=체력이 떨어지니 집중력도 약해지는 경우가 생기더라. 그래서 헬스클럽에 다니기 시작했다. 주로 하체근력 강화 운동을 한다. 꾸준히 해오던 등산도 계속 하고 있다. 그 결과가 최근 ‘양구 국토정중앙배’ 복식전 준우승으로 나타났다. 후배들에게 60대 선배도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럼 수많은 대회중 유독 기억에 남는 대회를 꼽는다면.
=1986년 ‘제1회 한국프로당구 최강전’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 나는 철저한 무명선수였다. 5년간 건설업체 토목기사로 일하다 막 당구판에 뛰어들었을 때였다. 그러던 1985년에 대한당구회가 출범했고, 이듬해부터 5년간 ‘한국프로당구 최강전’을 연달아 개최했다. 그 첫해 대회에서 내가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그 대회를 기점으로 이후 수많은 전국대회 우승을 거뒀다. 하지만 그 모든 우승들의 감동을 다 합쳐도 ‘제1회 한국프로당구 최강전’ 우승의 기쁨에 비하진 못한다.
▲1992년 서울 삼풍백화점에서 열린 ‘세계3쿠션월드컵’에도 출전했다. 그 대회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마지막 4차예선(Q라운드)에서 그해 유럽선수권대회 챔피언을 만났다. 주변에서 “힘들다” “고비다”란 말을 하도 들어서 내심 잔뜩 긴장했다. 그렇게 맞이한 경기에서 덜컥 첫 세트를 따냈다. “잘하면 되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 두 번째 세트에 사력을 다했고 결국 15:10으로 이겼다. 큐를 잡은 후 처음으로 세계적인 당구선수를 꺾은 순간이었다. 분명 그 선수는 나보다 실력자였다. 하지만 당구는 수많은 변수가 생기는 스포츠라는 걸 그때 새삼 깨달았다. 그 기세로 32강도 통과해 16강 올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6강에서 (임)윤수(현 대한당구연맹 학교체육위원장)에게 졌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준결승전도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
=(잠시 뜸들이다)슬프고, 아쉬웠던 대회로 기억된다. 당시 그 대회 대표선수로 선발된 나와 (김)정규(현 대한당구연맹 이사)는 ‘한국당구 중흥’을 위한 사명감을 가슴에 새기고 출전했다. 은메달, 동메달은 의미 없었다. 꼭 금메달을 따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준결승에서 일본의 우메다에게 3점차(47:50)로 졌다. 특히 47점째 이후 친 샷의 감각이 아직도 손에 남아있다. 앞돌리기가 키스가 나버리다니.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울컥한다.
▲아시안게임 출전한 그 즈음부터 당구이론 정립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김무순은 1996년부터 2009년까지 운영하던 ‘당구닷컴’ 웹사이트를 통해 3쿠션 규칙, 시스템 등에 관한 이론, 당시로선 생소했던 동영상 강의 등을 제작해 무료로 배포했다. 당구에 관한 서적조차 귀한 시기였기에, 당시 그의 사이트는 동호인들에게 온라인 ‘당구성지’로 여겨졌다. 회원수는 300만명 이상, 하루 최다 동시접속자 수는 3000여명에 달했다)
=여러 사람에게 당구의 재미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시스템 등 이론은 레이몬드 클루망(벨기에의 전설적인 당구선수)이 쓴 ‘미스터 100’의 내용을 참조했다. 강의 동영상은 조카들이 도와줘 촬영했다. 매달 서버유지비로 30만원씩 들어갔지만, 동호인들이 당구를 좀더 폭넓게 즐길 수 있어 뿌듯했다.
▲동호인들은 물론 선수들에게도 ‘스승님’으로 통하는데.
=1994년도 서울 북가좌동에 클럽을 오픈한 뒤, 2014년 이곳(서울 은평구)으로 클럽을 옮기기까지 24년째 클럽을 운영해오고 있다. 그동안 많은 후배들이 다녀갔다. 60여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기술뿐만 아니라 클럽운영 등 영업에 관한 문의도 많이 받았다. 그 중에 (김)경률이도 있었다. 혼자 추진하던 사업에 관한 어려움, 가정사 등을 털어놓곤 했다. 사망하기 이틀 전에도 여기(그가 운영하는 클럽)에 다녀갔는데…. 선배 입장에서 여러모로 아쉬운 선수다.
▲끝으로 당구인 김무순은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이고 싶은가.
=영원한 현역이고 싶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나이가 조금 많아도 현역으로 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 클럽운영 등 사업에서도 나름 성공적인 행보를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후배들도 그러한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선배이고 싶다. [sylee@mk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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