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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소년공이 쏘아올린 정치 신화

이재명 제21대 대통령선거 당선자 가난에 공장에서 일한 ‘소년공’ 제때 치료받지 못해 장애판정도 공장관리자 되려 공부…‘인권변호사’로 정치 입문 후 두 번의 대선 거쳐 대통령 당선

  • 배윤경,이상현,한수진,김혜진
  • 기사입력:2025.06.04 02:37:08
  • 최종수정:2025.06.04 02: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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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제21대 대통령선거 당선자
가난에 공장에서 일한 ‘소년공’
제때 치료받지 못해 장애판정도
공장관리자 되려 공부…‘인권변호사’로
정치 입문 후 두 번의 대선 거쳐 대통령 당선
1978년 야구 글러브 공장인 ‘대양실업’ 소년공 시절의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 모습. [사진 출처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캠프]
1978년 야구 글러브 공장인 ‘대양실업’ 소년공 시절의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 모습. [사진 출처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캠프]

가난과 장애를 딛고 일어선 소년공이 변호사 출신 정치인을 거쳐 4일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을 확정했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쌓아온 결단력 있는 행정가 이미지와 12·3 계엄 이후 빛의 혁명을 완수해 나가겠다는 의지가 더해지면서 6개월여간 달려온 그의 행보가 마침내 ‘정권교체’라는 결실을 맺게 됐다.

앞으로 5년간 ‘제21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이름조차 없던 소년공

1963년 10월 가을. 이 당선인은 경북 안동 농가에서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궁핍한 환경 탓에 출생신고를 제때 하지 못해 이 당선인 부모는 이후 점쟁이에게 물어 아이 생일을 정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엔 항상 배가 고팠다는 게 이 당선인의 기억이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이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으로 이사하면서 소년공 생활을 시작했다. 나이가 어린 탓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일하며 6년 동안 ‘이름 없는 소년공’으로 지냈다.

소년공 시절 그는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프레스에 끼여 좌측 손목이 골절됐는데,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6급 지체 장애 판정을 받았다.

공장 내 잦은 폭력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던 그는 막연히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자 공장관리자가 되려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에 매진하면서 1978년 고입, 1980년 대입 검정고시에 연달아 합격하고, 1982년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해 4년 만에 입시를 마쳤다.

1989년 사법연수원 졸업식에서 모친인 고(故) 구호명 여사와 기념 촬영을 하는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  [사진 출처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캠프]
1989년 사법연수원 졸업식에서 모친인 고(故) 구호명 여사와 기념 촬영을 하는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 [사진 출처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캠프]
인권변호사에서 정치인 이재명으로

대학에 입학한 이 당선인은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다짐했다.

어린 시절 광주 시민들을 ‘빨갱이’, ‘폭도’라 욕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진실을 알리고 약자의 권리를 대변해야겠다는 생각이 이십대의 이재명을 사로잡았다.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1989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노동현장 지원활동에 나서며 자신이 살던 성남시의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1994년엔 시민단체 ‘성남시민모임’ 발족과 함께 사무국 차장을 시작으로 집행위원장까지 맡았다. 이를 계기로 이 당선인의 지역 시민운동에 속도가 붙었다.

이 당선인은 1996년 서울남부저유소(대한 송유관공사) 건립저지운동을 벌였고, 경기 성남시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및 백궁 정자지구용도변경 관련 의혹을 제기, 이를 제지하는데 앞장섰다.

2004년엔 이 당선인을 지금의 자리에 있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발생한다.

2003년 성남의 대형병원이 문을 닫자 그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공공의료원 설립을 위한 주민발의 조례를 만들었지만, 시의회에서 조례가 부결되면서 “시장이 돼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정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두 번의 낙선 후 성남시장…이후 경기도지사까지

정치인으로서 그의 첫 도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2006년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성남시장 선거에서 떨어졌고, 18대 총선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섰으나 재차 낙선했다.

두 차례의 실패 후 2010년 민주당 후보로 성남시장 선거에서 승리하며 마침내 정치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취임 직후 성남시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3대 무상복지정책이라고 불린 청년 배당·무상 산후조리 지원·무상 교복 지원사업 등의 정책을 펼치며 유능한 행정가란 명성을 얻어 재선에도 성공했다.

2017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성남시장으로 강연을 하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 [사진 출처 = 연합뉴스]
2017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성남시장으로 강연을 하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행정적 역량을 토대로 2018년엔 20년 만에 민주당계 정당 출신의 경기도지사가 됐다.

그는 경기도지사 시절 불법 계곡 설치물에 칼을 빼드는가 하면 코로나19 장기화 속에서 재난지원금 지급 카드를 꺼내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등 결단력과 실행력을 갖춘 행정가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이어 제20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0.73%포인트 차로 석패했다.

대선 패배 후 국회입성…사법리스크 기사회생

그는 대선 패배 두 달여만인 지난 2022년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했다.

당 안팎에서 대장동 특혜개발 의혹과 법인카드 유용 의혹 등을 둘러싼 수사를 앞두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생존형 출마’란 지적이 나왔지만 그는 국회의원 당선에 이어 당 대표에도 선출됐다.

지난해 총선에서는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를 이끌어내며 당대표 연임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집권 기간 내내 이 당선인은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검찰의 연이은 기소로 위기에 몰렸고 2023년엔 국회 체포동의안이 가결되며 구속 기로에 놓이기도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월 2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월 2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특히 지난해 11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1심 재판에서는 징역 1년·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피선거권이 박탈될 위기를 맞닥뜨렸다.

하지만 올해 3월 같은 혐의 사건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기상회생했다.

지난달 1일 열린 상고심에선 대법원이 해당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며 이 당선인의 사법리스크가 재점화됐다. 공정성 시비에 휘말린 사법부는 파기환송심 공판을 대선 이후인 이달 18일로 연기했다.

12·3비상계엄 해제 앞장…‘어대명’ 인식 확산

지난해 12·3 비상계엄은 결과적으로 이 당선인의 입지를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당선인은 당시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할 수 있도록 의원들을 본회의장으로 불러 모았고, 국회로 향하는 길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라이브 방송을 켜 시민들도 국회 앞으로 모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12월 14일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진두지휘한 그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장기화되자 광화문광장에 천막당사를 설치하며 다시 거리로 나섰다.

헌재는 결국 지난 4월 4일 윤 전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당내에선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 분위기가 확산됐고 이 당선인은 대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6·3 대통령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2일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열린 출정식 및 첫 유세에 참석해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 = 김혜진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6·3 대통령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2일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열린 출정식 및 첫 유세에 참석해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 = 김혜진 기자]

이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에도 내란종식 의지를 강조하며 ‘빛의 혁명’을 이끌 적임자란 이미지를 부각해 왔다.

공식 선거 운동 기간 첫 유세 장소로 윤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인용을 촉구하며 시민들과 함께 집회를 열었던 장소인 광화문을 선택했고, 마지막 유세 장소로는 12·3 비상계엄 당시 계엄 해제를 의결한 국회의사당이 있는 서울 여의도를 정해 ‘빛의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당선인은 전일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의마당에서 열린 피날레 유세에서 “빛의 혁명이 시작됐던 이곳 여의도에서, 우리가 빛의 혁명을 완수할 것”이라며 “여러분들이 들고 계신 이 응원봉으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성지를 이제 그리스 아테나 아고라가 아니라,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와 광화문으로 민주주의를 보러 오는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어내겠다”고 강조했다.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열린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의마당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풍선을 흔들며 이 후보를 연호하고 있다. [사진 = 한수진 기자]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마지막 유세가 열린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의마당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풍선을 흔들며 이 후보를 연호하고 있다. [사진 = 한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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