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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소년공→변호사→시장→도지사 강한 돌파력으로 대통령까지 거머쥐어 [이재명 시대]

이재명이 걸어온 길
李, 청소노동자 집안 다섯째
중학교 대신 공장서 일하다
기계에 팔 찍히며 군대 면제
검정고시 거쳐 법학과 장학생
사시합격 뒤 인권변호사 활동
성남시장·경기도지사 때
저돌적 행정, 전국적 주목
3년 전 대권도전 尹에 석패
가족 논란·흉기 피습 딛고
결국 국민의 최종 선택 받아

  • 전형민
  • 기사입력:2025.06.04 01:31:34
  • 최종수정:2025-06-04 0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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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어린 시절은 참혹했다. 다른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내내 소년공이었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이 이번 대선을 앞두고 펴낸 '결국 국민이 합니다'의 한 구절이다. 중학교도 다니지 못한 소년공이 변호사였지만 시장, 도지사를 거쳐 기호 1번 대권 후보로 두 번째 선출됐다. 이 당선인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이다.

이 당선인은 1964년 경북 안동 예안면 두메산골에서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그의 가족은 1976년 2월 경기 성남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청소 노동자로, 어머니는 상대원시장 2층 건물의 공중화장실에서 일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그는 중학교 진학 대신 성남시 상대원동에 있던 동마고무 공장에서 소년공 생활을 시작했다.

소년공 이재명은 대양실업이라는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 프레스에 왼쪽 팔을 찍히는 사고를 당하고, 장해 등급 판정을 받아 군대를 면제받았다. 이 당선인은 소년공으로 일하면서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자격을 획득했다. 1982년 학비 지원과 생활비 20만원까지 받고 중앙대 법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중앙대 법대 교수였던 이상돈 전 국회의원은 "워낙 똑부러져서 입학 당시에도 교수들 사이에서 꽤 알려진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8년 사법연수원(18기)을 수료한 뒤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이 당선인의 정치인생 궤적은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배출한 전직 대통령들(김대중·노무현·문재인)과도 닮은 듯 다르다. 그는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기초단체장, 광역단체장, 국회의원을 모두 경험했다. 변호사 이재명은 자신에게 제2의 고향과 같은 성남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성남시민모임을 만들어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 등 지역 현안을 다뤘다. 열혈 활동가였던 그는 성남시 인구 4분의 1에 달하는 20만명의 서명을 받아 주민 발의로 내놓은 성남의료원 설립 조례안이 당시 시의회에서 47초 만에 휴지 조각이 되는 걸 본 뒤 정치 참여를 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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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2005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성남시장 선거(2006년)에 나섰지만 고배를 마셨다. 정치인 이재명의 첫 승리는 2010년 성남시장 재도전이었다. 그는 시장직에 오르자마자 성남시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하는 돌발행동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성남시장 이재명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면서 또 한 번 정치적 변곡점을 맞는다. 그는 가장 먼저 '탄핵'을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이 실제로 파면되자 치러진 조기 대선에 도전했다. 첫 번째 대선 도전이었다. 경선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대선과 경기도지사 경선 과정에서 친문재인계와 경쟁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은 상처로 남았다. 치열한 선거를 치르며 '혜경궁 김씨' '형수 욕설' '여배우 스캔들' 등 각종 논란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2018년 6월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16년간 보수 정당이 차지했던 경기도지사직 탈환에 성공했다. 계곡 불법 건축물 철거, 코로나19 당시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 검토, 전국 최초의 재난기본소득 등 성남시장 재직 당시부터 보여온 그의 저돌적인 행정은 때로 논란을 불렀지만,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당선인은 2021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낙연 전 국무총리를 누르고 본선에 진출해 두 번째 대권에 도전했다. 하지만 두 번째 대선도 본선 상대였던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역대 대선 최소 격차인 0.73%포인트 차이로 석패하며 고배를 마셨다. 그는 정치적 공백을 택하지 않고 곧바로 중앙정치에 복귀했다. 2022년 치러진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 같은 해 당대표 선거에서 77.77%를 득표해 승리했다.

여의도에 들어온 뒤 이 당선인의 정치 역정은 최대 위기를 맞이한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변호사비 대납 의혹, 쌍방울 관련 수사 등 과거 성남시장, 경기지사 시절과 관련한 사법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2023년 가을에는 자신을 향한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기도 했다. 가결을 앞두고 단식에 들어갔던 이 당선인은 가결 후 단식을 멈췄고,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2024년 1월 2일에는 부산 북항 방문 중 흉기에 목을 찔리는 정치 테러를 당했지만 서울로 옮겨 응급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 같은 해 8월에 치러진 당대표 선거에서는 85.4%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대표에 재선출됐다.

그렇게 3년 뒤 대선을 준비하던 이 당선인의 대선 시계는 지난해 12월 3일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급격히 빨라졌다. 마침내 4월 4월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고, 이 당선인의 세 번째 대권 도전은 예상보다 3년여 일찍 시작됐다. 두 번째 대선에 나선 2025년 그의 화법은 변화했다. 더 이상 변방이 아닌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기 때문일까. 중도층을 겨냥해 안정감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2025년 4월 27일 대선 후보 수락 연설문은 화제가 됐다. A4용지 11장 분량, 공백을 제외하고 4600자에 달하는 연설문이었다. 연설문에는 자신이 성남시장 출마를 결심했던 순간부터 3년 전 대선 패배에 대한 사과, 12·3 계엄에 대한 입장 등이 시계열 순으로 상세히 담겼다. 민주당 당원들의 감성을 충분히 자극하면서 국민 통합을 내세워 중도층 표심에도 다가가려는 메시지를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당선인의 인생 여정은 한마디로 '불굴'과 '도전' 그 자체였다. 스스로 길을 개척하며, 누구의 후광도 없이 변방에서 권력의 중심까지 내달린 그의 시간은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드라마였다. 문제를 마주할 때 그는 타협보다 돌파를 택했다. 때로는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동료와 국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치열함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국민은 이재명이라는 이름에 다시 한 번 힘을 실었다.

[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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