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백질 분석 AI ‘알파폴드’로
개발속도 높이고 부작용 줄여
“치매 단백질·암세포만 제거”
빅테크들 AI 제약바이오 도전
韓, 개인정보규제에 발목잡혀
인공지능(AI)이 신약 개발 생태계를 뒤흔들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약 하나를 개발하려면 10년이라는 시간과 1조원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구글 딥마인드가 단백질 구조 분석 플랫폼 ‘알파폴드’를 개발하면서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AI 영향력은 유망 후보물질 발굴을 넘어 새로운 단백질 구조 설계 등 신약 개발 전 과정으로 확대되고 있다.
2021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아뎀 파타푸티언 스크립스연구소 교수는 “알파폴드는 내가 경험한 가장 놀라운 과학적 진보 중 하나”라며 “25년 전에는 한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는 데 박사과정 학생이 5년을 투자해야 했지만, 이제는 서열만 입력하면 구조를 알려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가 21일(현지시간)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 AI가 설계한 신약으로 첫 임상시험을 시작한다고 밝힌 것은 ‘AI 치료제 시대’를 여는 선언이라는 평가다. 허사비스 CEO는 이날 자신을 “우선 컴퓨터 사이언티스트”라고 소개하고 “다음은 생물학자”라고 밝혔다.
AI는 신약 개발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것은 물론, 정확도와 완치율까지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예를 들어 지금은 지구에서 우주정거장까지 무인 로켓을 쏴서 치료제를 배달하려고 한다면 AI 신약은 비행사가 우주선을 타고 가서 아픈 사람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과 같다. 실패 확률도 낮고 정확하게 전달되며, 약물 부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개발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AI를 활용해 신약을 개발하면 신약 후보물질의 임상1상 성공률은 80~90% 선으로 기존 업계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허사비스 CEO의 말대로 암, 심혈관질환 등 사실상 모든 질병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알파폴드는 기존 방식으로 10억년이 걸렸을 작업(2억개 단백질 구조 예측)을 이미 끝냈다. 최신 버전인 알파폴드3는 단백질과 다른 단백질, 리간드, DNA와 RNA 간의 상호작용까지 분석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됐다.
허사비스 CEO는 다음 목표로 ‘가상 세포’ 시뮬레이션을 꼽았다. 파타푸티언 교수는 “전통적으로는 세포에서 단백질을 추출해 구조를 파악했지만, 이렇게 하면 세포 내 자연스러운 위치를 알 수 없다”며 “세포 전체를 보고 단백질의 위치를 파악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빅테크 기업도 앞다퉈 AI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었다. 많게는 수조 원을 투입하며 이 시장을 선점하려는 ‘쩐(錢)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챗GPT로 생성형 AI시대를 연 오픈AI는 단백질 구조를 바꿔 ‘더 오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다. 오픈AI 최고경영자(CEO)인 샘 올트먼이 1억8000만달러(약 2600억원)를 투자했는데, 오픈AI가 생물학 분야에서 AI 모델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 따르면 최근 오픈AI는 장수를 연구하는 스타트업인 레트로바이오사이언스와 함께 일반 세포를 젊은 줄기세포로 바꿀 수 있는 단백질 설계 모델 ‘GPT-4b 마이크로’를 개발했다. 이 모델이 실제로 적용되면 장기 제작이나 교체 세포를 공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오픈AI 측은 기대하고 있다.
오픈AI는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스타트업 ‘차이디스커버리’에도 투자했다. 총 3000만달러의 자금을 유치한 차이디스커버리는 ‘차이-1’이라는 단백질 구조 예측 AI를 공개하며, 구글의 알파폴드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AI를 이용해 신약을 개발하는 가상 공간인 ‘바이오네모(BioNeMo)’ 플랫폼을 공개했다. 글로벌 제약사와 스타트업은 이 플랫폼에 탑재한 생성형 AI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분자와 단백질을 설계하고 새로운 신약 후보물질을 찾을 수 있다. 실제 암젠, 에보자인 등 글로벌 생명공학 업체와 신약 개발사가 바이오네모를 활용하고 있다.
메타가 개발한 단백질 구조 예측 AI 모델인 ‘ESM폴드’는 최근까지 과학계에 밝혀지지 않았던 리보핵산(RNA) 바이러스 7만500개를 발견했다. 실험실에서 바이러스를 직접 배양하지 않고 다양한 환경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를 예측한 것이다.
앞으로 AI 경쟁력이 제약바이오 패권을 좌우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AI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인수하고 있다. 지난 17일 한국바이오협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5년간 AI 관련 거래 건수는 2배 이상 급증했다. 거래 규모도 3배 가까이 성장했다.
다만 한국 경쟁력은 아직 미진하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나중에는 결국 데이터를 많이 가진 기업이 제약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며 “아직 한국은 제대로 대비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 AI 발전의 걸림돌 중 하나는 개인정보 규제다. AI를 개발하려면 환자의 유전정보, 임상정보 등이 쌓여야 하는데 한국은 개인정보 규제가 강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20년 전에 만들어진 규제부터 최근에 만들어진 규제까지 뒤섞여 있는데 AI 치료제 시대를 선점하고 혁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고 했다.
황재성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책임연구원도 “AI 신약 개발은 자본 싸움이기 때문에 갈수록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처음에는 AI가 있으면 빠르고 저렴하게 신약을 개발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몇조 원씩 투입하는 게 다반사”라고 말했다.
황 연구원은 “훌륭한 국내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도 위험 요인이다. 전 세계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만큼 우리 정부도 서둘러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
[다보스 특별취재팀 = 황인혁 부국장 / 윤원섭 뉴욕 특파원 / 진영태 기자 / 연규욱 기자 / 문가영 기자(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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