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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헨리·니콜라’ 누가 그들을 울렸나

‘고소득 흙수저’ 사다리 걷어차기 ‘능력주의’ 신화 뿌리부터 흔들린다

  • 배준희
  • 기사입력:2025.10.01 21:00:00
  • 최종수정:2025-10-01 16: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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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득 흙수저’ 사다리 걷어차기
‘능력주의’ 신화 뿌리부터 흔들린다

‘Inheritocracy(상속계급사회).’

영국 역사학자 엘리자 필비가 지난해 9월 펴낸 책 제목이다. 젊은 세대는 각고의 노력으로 고소득 전문직이 되더라도 증여·상속 등 자산 대물림 없이는 안정적인 자산 축적이 어렵다는 지적을 담았다. 수억원대 연봉을 벌어도 높은 소득세율, 사회보장 관련 세금, 대출 원리금 등으로 세후 소득이 뚝 떨어진다. 특히, 근로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부동산 같은 전통자산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무력감이 팽배하다. 세계적으로 이런 계층이 정치사회적 이슈로 대두됐다. 프랑스에서는 ‘니콜라’가, 미국·영국에서는 ‘소득이 높지만 부자는 아닌’ 젊은 층을 뜻하는 ‘헨리(HENRY·High Earners, Not Rich Yet)’가 세대 갈등 진원지로 떠오른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근로소득을 비웃듯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는 부동산 등 자산 격차에 박탈감을 느끼는 ‘한국판 헨리·니콜라’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매경이코노미가 그들의 울음을 들여다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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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소재 의대를 나온 40대 초반 A씨. 그는 수도권 병원급 의료기관(30개 이상 병상을 갖춘 의료기관)에서 ‘페이 닥터’로 근무하며 세후 소득 기준 월 1500만원을 번다. 맞벌이를 하는 부인도 금융 전문직이다. A씨 부부 가구 소득은 세후 월 2000만원이 넘는다.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적 성공을 일궜지만, A씨 부부는 스스로 ‘한국판 헨리·니콜라’라며 자조한다. 그는 “전문직 의사가 되기까지 15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지만 학부 4년을 나와 부모에게 부동산 등 자산 증여를 받은 고교 동기 순자산은 벌써 수십억원이 넘는다”라며 “자녀에게는 내가 느끼는 절망감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털어놨다.

‘한국판 헨리·니콜라’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헨리(HENRY·High Earners, Not Rich Yet)’ ‘니콜라’는 3040 고소득 중산층이지만, 높은 세율과 대출 이자 등으로 자산 축적에 어려움을 겪는 계층을 뜻한다. 프랑스 등 유럽은 물론 미국·영국에서 사회갈등 뇌관으로 떠오른 가운데, 한국에서도 ‘소득이 높지만 부자는 아닌’ 젊은 층을 중심으로 무력감이 팽배하다. 전문가들은 고소득 중산층마저 사회불만 세력화한다면 자본주의 정당성을 떠받쳐온 ‘능력주의’ 신화가 무너지고 지위 역동성이 사실상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에서도 프랑스, 미국처럼 개인 소득 수준이 자산 수익률을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한국판 헨리’를 규정하는 명확한 잣대는 없다. 대체로 대기업·전문직 등에 종사하며 가구 평균소득(근로소득과 사업소득 등 합산) 1억원 이상일 경우를 ‘한국판 헨리’로 분류할 수 있다. 통계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이 공동 수행한 ‘2024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 평균소득은 7185만원으로 전년(6762만원) 대비 6.3% 늘었다. 가구소득 분포를 살펴보면, 평균소득 1억원을 기준선 삼을 경우 22.6%다. 상위 20%로 더 좁히면 가구 평균소득은 1억6602만원이다.

부동산 등 자산 격차로 ‘한국판 헨리’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악화일로다. 이는 여러 통계로 확인된다.

우선, 연령별 주택 소유 비중을 보면 50대 이상이 약 68%에 달한다(통계청·2022년 주택소유통계). 2030은 전체 11%에 불과했고 현금흐름이 가장 활발한 연령대인 40대는 21.1%다. 아직 현금흐름이 성숙하지 않은 2030세대가 주택 소유 비중이 낮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자산 편중과 증가 속도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2024년 3월 말 기준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 상위 10%(10분위) 가구 점유율은 44.4%로 전년보다 1%포인트 늘었다. 상위 10% 가구가 전체 순자산 45%가량을 차지하고 있단 의미다. 순자산 상위 10% 가구 점유율은 2017년 41.8%를 기록한 이후 계속 늘고 있다. 순자산 9분위 가구 점유율도 같은 기간 18.2%에서 18.6%로 늘었다. 반면, 순자산 1분위부터 8분위까지 점유율은 모두 줄었다.

2023년 자산가액 기준 상위 10% 가구가 소유한 평균 주택 가격도 12억5500만원으로 하위 10% 평균가액(3100만원)의 40.5배에 달한다. KB부동산 조사를 보면, 지난 9월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14억2224만원이다. 자산 격차는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 지니계수는 최근 수년간 줄곧 상승세다. 2024년 순자산 지니계수는 0.612로 2012년(0.617) 이후 가장 높았다. 이런 통계를 돌아보면 대체로 서울 부동산 가격 상승과 맞물려 자산 불평등이 심화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최근 한국에서도 ‘소득이 높지만 부자는 아닌’ 젊은 층을 중심으로 자산 양극화에 따른 무력감이 팽배하다. (연합뉴스)
최근 한국에서도 ‘소득이 높지만 부자는 아닌’ 젊은 층을 중심으로 자산 양극화에 따른 무력감이 팽배하다. (연합뉴스)

‘헨리·니콜라’ 세계적 현상

성장률↓·자산 증가 속도↑

‘헨리·니콜라’ 계층 불만은 전 세계적 현상이라는 게 여러 전문가 지적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등에서는 상속계급사회(Inheritocracy) 도래를 경계해야 한다는 섬뜩한 경고마저 내놨다.

전문가들은 고소득 중산층마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경제성장률 둔화다. OECD 국가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1950년대 연평균 4% 이상, 1960년대 5% 수준이었다. 이후 1970~1980년대 많은 선진국이 고도성장을 구가했지만 2010년 들어 2%대로 고착화 양상이 짙다. GDP 성장률이 둔화하면 생산성 정체 → 임금 상승 둔화 → 근로소득 성장 한계 악순환이 나타난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이미 1980년대 이후 실질임금 정체(Wage Stagnation) 현상이 뚜렷하다는 게 다수 전문가 진단이다.

둘째, 인구구조 변화다. 베이비붐세대는 주택, 금융 시장 급등 국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다른 세대보다 훨씬 많은 부를 빠르게 축적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들 은퇴가 본격화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 자산 이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25년 선진국에서 상속 자산은 약 6조달러(약 8318조원)로 세계 GDP 10%에 달한다. 이는 20세기 중반의 두 배 수준으로, 유럽 주요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동일한 추세다. 셋째, 현세대 세 부담 증가다. 기성세대인 베이비붐세대가 현세대에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떠안겼고 자신들이 그 부채를 갚으려 허덕인다는 게 ‘헨리·니콜라’ 현상 뼈대다. 결국 이 같은 요인이 맞물려 초상류층 전유물로 여겨졌던 증여·상속이 중산층까지 실질적인 삶의 질과 성공 척도를 가르는 구조적 변수로 부상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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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대 세 부담 급증

사회 역동성 실종 우려

앞으로 이런 현상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더 악화할 것이란 우려가 높다.

무엇보다 젊은 세대가 떠안는 세 부담이 갈수록 커진다. 이는 한국을 포함한 주요 선진국 공통 현상이다. 한국 역시 진보·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국가 재정을 쌈짓돈처럼 써왔고 이재명정부에서도 유례없는 수준의 확장 재정을 편다. 이재명정부는 이미 적자 국채를 100조원 이상 발행하는 내년 예산안을 편성한 데다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정부 주도 3500억달러(약 485조원) 투자를 약속했다. 중장기적으로 한국 역시 재정적자 확대 → 국채 금리 급등 → 이자 부담 증가 → 재정 압박 악순환 고리에 빠져들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게 됐다.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돈을 풀어 적자가 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복지성 현금 살포 등으로 민주당 집권기 확장 재정 기조가 나랏빚을 악화시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고소득 중산층마저 지위 경쟁 대열에서 이탈한다면 사회 계층 이동성이 현저히 둔화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2013년 사회조사 계층 인식 항목에서 중층이라고 답한 응답자의 38.9%가 본인 세대 계층 이동 가능성을 높다고 봤다. 이 비율은 2023년 31.5%로 하락했다. 10명 중 7명은 상층으로 이동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다음 세대 계층 이동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도 가능성이 높다는 응답은 같은 기간 46.5%에서 33.3%로 곤두박질쳤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행과 공동 연구 보고서에서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LTV) 규제로 전문직·맞벌이 신혼부부 등 ‘고소득·저자산’ 계층은 내집마련에서 더욱 소외되는 반면, 현금 유동성이 풍부한 계층은 상대적으로 유리해지는 구조”라며 “자산 불평등이 심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9호·추석합본호 (2025.10.01~10.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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