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금융 질서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히 디지털 자산(코인) 투자용 통화를 넘어 실물경제와 연결된 결제 수단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글로벌 주요국은 발 빠르게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과 정책을 논의하는 중이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치열한 스테이블코인 ‘선점’ 전쟁
한국은 아직 법적 지위조차 불분명
글로벌 주요국은 앞다퉈 스테이블코인 주도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자본 시장 제도권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법제화 작업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미국 상원은 지난 5월 20일(현지 시각) ‘지니어스법안(GENIUS Act)’ 본회의 심의를 위한 표결을 통과시켰다. 주 정부 감독 아래 있는 비은행 기관도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는 등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를 마련하는 내용을 담았다.
유럽연합(EU)은 이미 2023년 발효된 ‘미카(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정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기반을 닦아놓았다. 스테이블코인을 전자화폐형(EMT)과 자산준거형(AART)으로 구분하고 발행사에 요구되는 자본 요건과 준비금 관리 의무를 법제화했다.
여타 아시아 국가도 스테이블코인 규제 마련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일본은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규제를 택했다. 2023년 개정된 자금결제법을 통해 은행과 신탁사 등 공공성 높은 기관에만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했다. 싱가포르는 지난해부터 스테이블코인 발행·유통에 대한 규제 가이드라인을 시행 중이다.
반면 한국은 아직 스테이블코인 법적 지위조차 불분명한 상태다. 지급 결제 수단인지, 아니면 금융 상품인지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민간 기업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허용되지 않고 있고 명확한 규제 체계도 없다. 금융위원회는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 2단계 입법 과정에 스테이블코인 포함 여부를 논의 중이고 한국은행은 디지털화폐(CBDC) 실거래 실험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실험을 진행 중이긴 하다. 하지만 제도권 편입과 규제 관련 세부 사안은 공백 상태다.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 정책과 제도 마련 논의가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디지털경제금융연구원장)는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결제 혁신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며 “도입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신산업이라는 전제 아래 정책과 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테이블코인이 갖는 ‘리스크’는
자본 유출·코인런·신뢰성 우려도
한국 정부가 스테이블코인 제도권 편입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스테이블코인 발행·유통이 야기할 수 있는 ‘리스크’ 때문이다. 대규모 환매 리스크와 통화 주권 침해 등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우려가 적잖다.
현재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달러 기반이 90% 이상이다. 테더(USDT), USDC 같은 시총 상위 코인은 모두 달러 가치에 연동돼 있는 스테이블코인이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 주요 코인 거래소에서는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거래 비중이 급증하는 추세다.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8조5148억원이던 국내 4대 원화 거래소 내 테더 월 거래액은, 지난해 12월 28조7715억원까지 늘었다.
문제는 스테이블코인이 일반 결제망으로 확산했을 때다. 이렇게 되면 국내 소매점에서도 달러에 연동한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를 받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결제 확대는 원화 수요 감소로 이어져 원화 중심 통화 체계에 근본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실제 서울 강남과 남대문, 명동 등 외국인 방문이 잦은 지역을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취급하는 환전 업소나 현금을 테더로 바꿔주는 불법 환전 업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미 테더가 국내에 들어와 있고, 경상수지에 잡히지 않는 무역 거래에서 결제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상황”이라며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확산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국내 결제 시장의 일부가 정부 통제를 벗어난 암달러 시장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도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가장 큰 한계는 원화 역외 거래를 허용해야 한다는 점”이라며 “원화 스테이블코인 거래로 원화 유출 구조가 생기면 환율 정책이 통제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테이블코인 신뢰성에도 문제가 제기된다. 민간이 발행한 코인이 중앙은행 법정화폐와 같은 신뢰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우려다. 예를 들어 시총 1위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테더는 법인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돼 있어 감사 보고서 제출 의무가 없다. 공표된 재무제표에 대한 신뢰 역시 낮다.
안정성에도 의문부호가 붙는다. 스테이블코인 가치 변화가 커지면 대규모 환매 사태, 이른바 ‘코인런’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상환을 위해 국채와 예금 등 준비자산을 대거 투매하면 코인은 물론 전체 금융 시장 안정성이 크게 침해될 수 있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스테이블코인 안정성 리스크를 방지하기 위해선 자금 세탁 방지와 지급 준비금 체계 명확화 같은 제도가 핵심 과제로 선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효용은?
이재명 新정책…해외 투자 유치↑
원화 주권을 지키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말 그대로 원화 가치에 일대일 연동되는 디지털 화폐다. 정부나 민간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 발행 액수만큼 원화를 보유하거나 국채를 담보로 잡는 방식이다.
정치권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5월 국내 주요 가상자산 거래소와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DAXA)간담회를 열고,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과 활성화 방안을 논의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만들어놔야 국부 유출을 막을 수 있다”며 정책 공약집에서 스테이블코인을 ‘공정 경제’의 한 부분으로 비중 있게 다뤘다.
전문가들은 새 정부 스테이블코인 정책을 국가 산업 재편과 금융 시스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전략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효용이 분명하다는 주장이다. 김용진 교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기존 국제 송금에서 필요한 복잡한 과정과 비용이 줄어들면서 해외 투자자가 쉽게 한국 자산이나 기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 K-컬처, K-푸드, K-팝 등 다양한 콘텐츠 산업을 비롯해 침체에 빠진 제조업 프로젝트파이낸싱(PF) 조성에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유입 자금을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계 코인 국내 잠식을 막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국부 유출 우려가 커지는 중이다. 담보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한다는 전제하에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권 편입이 필요하다”면서 “당장 입법이 여의찮다면 규제 샌드박스로 스테이블코인을 부분 도입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제도 설계를 구체화하는 방식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3호 (2025.06.09~2025.06.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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