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시기엔 경제 원로의 통찰에 귀기울여봄직하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전두환정부에서 금융통화위원, 노태우정부 시절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과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장관, 김영삼정부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한국은행 총재까지 진보와 보수 정권을 두루 거치며 대한민국 성장을 이끌었던 대표 경제학자다. 만 8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현실 진단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격동의 시대, 경제 원로의 혜안은 한국 경제 ‘난수표’를 풀 열쇠가 될 수 있을까.
![1936년생/ 전북 김제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중앙대 교수/ 대통령 경제수석/ 건설부 장관/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전 한국은행 총재 [매경DB]](https://wimg.mk.co.kr/news/cms/202505/30/news-p.v1.20250530.b3d97fe38f58452e8ab125581b74da25_P1.jpg)
Q. 최근 미국 달러 패권 약화 조짐과 미 국채 시장 불안정성이 한국 경제를 강타했다. 가장 큰 위협은.
A. 인위적인 원화 절상(원화 강세)이다. 트럼프정부가 플라자합의에 준하는 강력한 달러 약세 정책을 주요 국가를 상대로 펼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특단의 조치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사실상 앞으로 원화 강세 시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느 수준까지 감내할 수 있는지 명확한 대비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원달러 환율이 1200원대 초중반일 때는 2003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2010년대 중반부터 코로나19 초반까지였다. 그땐 국내 주가는 올랐고 물가는 안정됐다. 다만 경기 과열 등 변동성이 컸다. 이런 점을 잘 살펴야 한다. 더불어 이 틈을 타고 위안화 지배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달러화 위상이 약화하는 상황에서 유로화와 함께 달러 대체 통화로 자리매김하려는 중국 정부 의지가 뚜렷하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위안화 영향력이 커지면 원화는 더 약화된다.
Q. 한국 정부가 우선 추진해야 할 경제 정책은.
A. 대미 협상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트럼프 집권 후 한미 FTA는 사실상 종료된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이 원하는 걸 주면서 실리를 챙겨야 한다. 최근 민간 차원에서 미국 현지 투자를 늘리는 건 의미 있다. 이를 지렛대 삼아 우리도 받을 건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더불어 원화 강세 시대에 맞춰 경제 환경 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 과거 원화가 강세를 보이면 우리 수출 기업 타격이 컸다. 지금은 우리 기업 해외 현지 진출이 많아 과거처럼 수출이 크게 타격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물가 안정과 내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 외국 자본 유입이나 외국인 관광객 증가로 국내 경기가 살아날 수 있는 만큼, 이들이 좀 더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수출 주도형 시대는 사실상 끝났고 신(新)내수 주도형 경제에 대비해야 한다.
한 가지 더 강조하고픈 부분은 산업 구조조정이다. 경쟁력 떨어지는 좀비 기업을 그동안 중소기업 지원이란 명목 아래 연명하게 했는데 이젠 안 된다. 산업 변화에 맞게 자연 도태시키고 새로운 업종, 산업에 투자할 수 있는 정부 정책 유연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Q. 미국 정부 부채가 막대하다. 국채 발행 증가폭도 커졌다. 글로벌 ‘탈(脫)달러’ 움직임이 가속화할 경우 한국은행 통화 정책 방향은.
A. 외환 보유액은 한국은행 능력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한국은행이 외환 수지를 봐가며 통화 정책을 잘 운용하고 있다고 본다. 수출이 다소 불안하지만 흑자를 유지해 큰 문제는 없다. 현재로서는 정책을 바꿀 만큼 ‘탈달러화’가 심하지 않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게 변수다.
Q. 주요 국내 기업이 해외에 공장을 지으면 국내는 ‘산업 공동화’가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A. 미국 정책을 받아들이려면 미국 투자가 불가피하다. 대신 한국 안에서 중요 기간 산업, 첨단 산업 분야에 적극적인 투자 유발 정책을 펴야 한다. 반도체·AI 등을 위한 전력·통신·인프라를 까는 것만으로도 내수 경기 활성화에 도움 된다. 이러려면 조세 감면, 규제 혁파 등 투자 유도형 정책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큰 정부’를 구성해 정부 주도로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당장 힘겨워하는 내수를 살리기 위해 돈을 푸는 것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Q. 한국 부채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국가 부채 증가를 용인해야 하나.
A. 일시적으로는 추경 등으로 국가 부채 증가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한국은행도 금리를 내릴 수 있다. 다만 위기를 어느 정도 벗어난 이후 ‘피크 코리아(한국 경제의 최정점 도달)’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대선 후보들이 구조 개혁 없이 재정 확대에만 의존하는 단기 부양책, 재원 대책 없는 복지 확대, 생산성과 관계없는 노동 시간 단축과 정년 연장, 구체성이 떨어지는 규제 완화 등을 주장해 좀 실망스럽다. 이는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더욱 약화시킬 뿐이다. 절대 포퓰리즘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새 정부는 장기적으로 재정 건전성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유지하면서도 미래 먹거리 마련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Q.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인가.
A. 전 국민 기본소득은 맞지 않다고 본다. 노인 교통비 무료 같은 정책도 기준을 높여야 한다. 지하철 적자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노인 무료라면 노인 기준을 70세 이상으로 올리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기본소득 정책을 꼭 하겠다면 대상은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약자,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농민에게 지급하는 쪽으로 한정했으면 한다.
Q. 원화 강세, 금리 하락기가 온다면 가계 부채, 부동산 가격 급등이 우려된다.
A. 최대 난제는 부동산이다. 다만 인구 감소 등 여러 요인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집값이 크게 상승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이것이 나는 기회라고 본다. 안정적인 집값이 조성되면 다시 청년들이 가정을 이루고 자연스레 인구 증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린벨트를 해제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부동산 공급을 늘려야 한다. 그러면서 병행해야 할 정책이 부동산 보유세 강화다. 현재 한국의 부동산 보유 과세는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예를 들어 미국 텍사스는 부동산에 재산세와 교육세를 부과해 부동산 소유자가 국민 교육을 재정적으로 책임진다. 미국은 한국의 3배에 달하는 보유 과세를 부과한다. 한국의 문제는 공급 부족과 낮은 보유 과세에 있다. 보유 비용이 낮으니 집이 투자 대상으로 인식된다. 한국의 주택을 투자 수단에서 주거 수단으로 되돌려야 한다. 이는 빈부격차와 저출생 문제 해결에도 기여한다.
Q.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주장은 여전하다. 저성장 고착화를 극복하려면.
A. 부동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부동산으로 저출생 문제를 잡고 동시에 이민을 받아들여 양질의 인력을 보강해야 한다. AI 시대 기초 과학기술에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는데 정부와 기업, 교육이 삼위일체 노력이 필요하다. 민간에만 맡길 게 아니다. 산업과 교육 발전을 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2호 (2025.06.04~2025.06.10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