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탄생한 대다수 한국 기업은 오너 경영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가족 기업’ 형태로 운영됐다. 확고한 주인의식, 가족 전통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리더십, 과감한 투자, 신속한 의사결정 등 가족경영의 장점은 국내 기업들이 급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가족경영의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이 서서히 부각되는 추세다. 가족 내 갈등·경영권 승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기업 경쟁력이 하락하는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피를 나눈 가족이 운영하는 기업에서 회사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로 치열한 경영권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갈등을 일으키는 내부 요인
승계 전략 부재와 유대감 약화
가족경영 기업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은 크게 내부 요인과 외부 요인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내부 요인은 승계 전략 부재, 유대감 약화 등이 꼽힌다.
분쟁 발단의 원인은 미비한 승계 전략이다. 그동안 국내 대기업의 가족 간 분쟁은 선대에서 후계 구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을 때 발생했다. 2000년대 현대그룹 왕자의 난, 2015년 신동주·신동빈 형제간 롯데그룹 분쟁이 대표적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최근 남매간 경영권 다툼 속에 한화그룹으로 경영권을 넘긴 아워홈 사례도 결국엔 후계 구도를 명확히 정리하지 못한 게 갈등의 씨앗이 됐다. 단순히 후계 구도만 확립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상속세라는 큰 장벽이 남아 있다. 후계자에게 지분을 상속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상속세가 발생한다. 이를 위해 대규모 자금을 확보하고 지분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촉발한다.
2024년 내내 재계를 뒤흔들었던 한미약품 경영권 분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2020년 창업주 임성기 회장이 별세하자 대주주 일가는 50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마련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임성기 창업주의 배우자인 송영숙 회장과 딸 임주현 사장은 OCI그룹과 합병하는 ‘묘수’를 찾아냈다. 당초 사모펀드 라데팡스파트너스에 지분을 팔아 상속세 재원을 확보하려 했으나 이 거래가 불발되면서 생각해낸 방안이었다.
하지만 다른 상속자인 두 아들과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이는 곧 경영권 분쟁의 씨앗이 됐다. 모녀와 형제 진영으로 나뉜 싸움은 끝이 났지만, 두 진영 모두 승자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두 진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한미사이언스 지분을 모은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 최후의 승자가 됐다. 신 회장은 개인 최대주주로 올라서며 한미약품그룹 경영에 개입하고 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상속세율은 최고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며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가족 간 지분 분할과 자금 확보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 그로 인해 갈등이 심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가족 간 유대감 약화도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유교 문화가 남아 있던 과거에는 가장인 창업주의 뜻이 절대적이었다. 아버지 뜻에 따라 형제끼리 기업을 나눠 가지거나, 특정 후계자에게 몰아줬다. 여성들은 아예 경영에 참여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후 시대가 변하고, 가족 간 유대가 약해지는 오너 3·4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상속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몫을 적극 챙기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들이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지분과 회사 경영권을 둘러싼 싸움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동성제약과 한국콜마 경영권 분쟁은 ‘유대감 약화’가 미친 영향이 컸다.
동성제약은 최근 삼촌과 조카 간 경영권 분쟁이 치열하다. 창업주 故 이선균 회장의 막내아들 이양구 회장이 지난해 조카 나원균 대표에게 경영권을 넘기며 3세 승계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올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이 회장이 보유 중이던 지분 14.12%를 마케팅 회사인 브랜드리팩터링에 매각하면서 갈등이 본격화됐다.
이 회장은 현 경영진이 경영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만큼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나 대표와 이사진을 교체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맞서 나원균 대표는 5월 7일 서울회생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상장사가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면 회생절차 개시 전까지 임시 주총에 제동이 걸린다. 나 대표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이 같은 선택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콜마 분쟁은 상속인들이 서로 경영 주도권을 쥐려는 상황에서 갈등이 촉발됐다.
콜마홀딩스 대표이자 윤동한 창업주 장남인 윤상현 부회장은 실적 부진이 이어진 건강기능식품 ODM 제조 전문 기업 콜마비앤에이치 경영에 개입하려다 회사 대표이자 여동생인 윤여원 사장과 정면 충돌했다. 콜마비앤에이치는 윤 대표가 맡기 시작한 2020년 1092억원이던 영업이익이 지난해 246억원으로 77%나 줄었다. 올 1분기 영업이익도 전년 동기 대비 62% 감소한 36억원에 그쳤다.
윤 부회장은 이 같은 실적 악화를 이유로 자신과 외부 인사의 이사회 진입을 요구했지만 윤 대표가 거부하면서 법원에 임시 주총 소집을 신청했다. 지주사 콜마홀딩스는 콜마비앤에이치 지분 44.63%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윤 부회장은 지주사 지분 31.75%를 확보했다. 반면, 윤 대표의 콜마비앤에이치 지분은 7.78%로 열세에 놓여 방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창업주 윤동한 회장이 “화장품은 아들, 건기식은 딸” 체제를 재확인하며 중재에 나섰지만, 윤 부회장 측은 “주주 가치가 우선”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 분쟁의 향방은 오는 6월 18일로 예정된 임시 주총 허가 여부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외부에서 갈등 촉발시키기도
시장 박한 평가, 제3세력이 공격
기업 후계자에 대한 시장의 불신, 사모펀드를 비롯한 외부 세력의 공격도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남매 네 명 사이 갈등으로 회사가 휘청거린 아워홈은 후계자에 대한 시장 불신이 분쟁의 씨앗이 됐다. 당초 막내딸 구지은 씨가 경영하던 아워홈은 구지은 대표 관련 잡음이 계속 일자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장자 구본성 전 부회장이 뜬금없이 들어와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구 전 부회장의 경영 능력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보냈다. 설상가상 구 전 부회장이 보복운전 혐의로 2021년 1심 재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자 구 전 부회장에 대한 시장 신뢰가 완전히 사라졌다. 외부 평판을 명분으로 세 자매가 구 전 부회장을 해임하고 경영권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후에도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고 네 남매는 경영권을 둘러싸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그렇게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아워홈은 경영권을 결국 제3자인 한화그룹 손에 넘기고 말았다.
외부 세력이 승계 구도에서 밀린 상속인을 부추기면서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한진그룹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른바 ‘땅콩 회항’ 사태로 경영 일선에 물러난 조양호 회장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2020년 외부 세력인 행동주의펀드 KCGI, 반도건설과 손을 잡고 동생이자 후계자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을 향해 경영권 분쟁을 선언했다. 조 전 부사장은 “조원태 회장이 공동경영이라는 선대회장 유훈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반기를 들었다.
이후 조 전 부사장은 KCGI, 반도건설과 지분 공동보유 계약을 체결한 뒤 조 회장 체제에 대한 도전을 공식화했다.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조원태 회장이 승리하며 분쟁은 일단락됐지만, 이는 곧 시장에 한진그룹의 취약한 지분 구조를 알리는 사건이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배구조가 흔들린 한진그룹은 어렵사리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성공하긴 했지만, 올 들어 2대 주주인 호반그룹으로부터 경영권 위협에 시달리는 등 불안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형 로펌 가사·상속 시장 잇따라 진출
가족경영 기업의 내부 갈등에 조용히 웃음 짓는 이들이 있다. 바로 법조계다. 재벌 부부의 이혼, 형제간 분쟁이 늘어나면서 가사·상속 사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어서다.
본래 가사·상속은 법조계에서 ‘마이너’한 분야였다. 형사·특수 사건처럼 세간 주목을 받는 분야가 아니었고, 기업 자문처럼 돈이 되는 사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사·상속 사건은 중소형 로펌이나 개인 변호사사무소에서 맡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가 바뀌었다. 재벌 가문 가정사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가사와 상속 사건은 로펌의 새로운 먹거리로 떠올랐다. 대형 로펌들은 저마다 가사·상속 관련 서비스를 늘리는 분위기다.
10대 로펌은 올 들어 가사·상속 관련 조직을 개편하며 시장 선점에 나섰다.
김앤장법률사무소는 기존 가사상속·자산관리팀을 확대·개편한 가사상속·기업승계센터를 지난 4월 출범시켰다. 법무법인 화우는 기존의 WM(Wealth Management)팀을 2024년 11월 자산관리센터로 키웠다. 법무법인 YK 역시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출신 배인구 대표변호사를 중심으로 가사상속가업승계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YK 민사총괄부를 확대·개편한 조직이다. 법무법인 동인도 가족법센터 문을 열었다.
로펌들은 조직 개편을 진행하는 동시에 전문 인력을 적극 배치하는 모양새다. 태평양의 자산관리승계센터는 가사팀, 조세팀 등 조직에 30여명의 변호사와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법무법인 율촌은 변호사 20여명, 회계사와 세무사 20여명 등 모두 40여명으로 팀을 꾸렸다.
“주요 로펌마다 이혼, 상속, 혼인무효 관련 업무가 끊이지 않는 분위기다. 가족끼리 단단히 뭉치던 과거와 달리 재벌가도 이제는 서로를 전혀 챙기지 않는 시대가 됐다. 같은 이혼 소송이라도 일반 개인과 기업 오너의 소송은 무게감이 다르다. 대형 로펌이 가사·상속 분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사 전담 변호사 수도 많지 않은 만큼 당분간 인력을 수혈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할 것이다.” 로펌 업계 관계자가 전하는 분위기다.
[반진욱 기자 ban.jinuk@mk.co.kr,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1호 (2025.05.28~2025.06.03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