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화가 4인의 ‘선’ 작품 한곳에
인생녹아든 조형 언어 ‘선’ 제각각

메마른 갈색 선을 멀리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건조한 겨울나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꿈틀꿈틀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추운 겨울에도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그러하듯 엄유정 작가의 선은 약해 보이지만 단단하게 다가온다. 작품명 ‘Feuilles’은 프랑스어로 잎이라는 의미다. 엄 작가는 잎·나무의 고유한 형태 이면에 숨겨진 상반된 특성에 주목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글로벌세아그룹에서 운영하는 S2A(에스투에이)에서 오는 7월 5일까지 네 명의 여성 화가 박인경(1926), 차명희(1947), 김미영(1984), 엄유정(1985)의 ‘유영하는 선’ 전시를 개최한다.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하는 화가들의 ‘선(線)’을 중심으로 한 작업을 한자리에 모았다.
가장 본질적인 조형 수단인 선을 그린 작품들은 1차적으로 추상성을 띤다. 하지만 작가들은 나무·숲 등 다양한 대상을 그려내 추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번 전시의 회화 및 드로잉 50여 점을 다 보고나면 왜 전시 제목이 ‘유영하는 선’인지 단박에 이해하게 된다. 네 작가에게 선은 감각적 리듬과 미적 질서를 구성하는 핵심이다.

1세대 여성 화가 박인경의 수묵 추상은 유독 묵직한 힘이 느껴진다. 박 작가의 작품명 ‘Envol’은 프랑스어로 이륙, 날갯짓과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이 작품에서는 간결한 지필묵을 활용해 기운생동하는 광경을 그렸다. 평소에 그는 지필묵을 활용해 숲, 나무 등 자연을 표현하는 전통 수묵화의 흐름을 잇되, 재료를 화면에 쏟아붓는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고 과감히 생략·확대하는 서양식 추상화의 면모를 보여줬다.
1926년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난 박 작가는 남편 고암 이응노 화백과 함께 평생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는 반공 이데올로기 이슈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동양화의 정신성과 서양화의 조형성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1947년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난 차명희 화가 작품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서정적이다. 그의 회화 ‘바람에 실려온 편지’는 캔버스 위에 회흑색 아크릴로 바탕을 만든 뒤 목탄으로 선을 그어 봄 바람에 흩날리는 꽃·나무를 형상화했다.
차 작가는 초기에는 한지 위에 먹과 채색의 번짐을 활용한 수묵화 기법을 썼지만 점차 아크릴과 목탄 같은 현대적 재료를 활용해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 그의 최신작들이 소개된다.

전시는 1980년대 태어난 두 젊은 작가 김미영·엄유정의 선을 함께 다룬다. 김미영 작가의 작품은 다채로운 색감과 리듬감 있는 움직임을 담았다. 김 작가의 작품명 ‘리프 더 딥스(Leap-The-Dips)’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롤러코스터를 가리킨다. 작품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선을 쌓아서 롤러코스터의 시원한 움직임과 속도감을 표현했다.
김 작가는 한국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회화를 배웠다. 동양화의 기법과 서양화의 재료를 결합한 고유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빠르고 직관적으로 색을 덧입히는 기법을 활용하는데 색들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흐르면서 예상치 못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 특유의 반복과 변주의 선이 돋보이는 스노우볼 유화 시리즈부터, 펜 드로잉 페이퍼 작업까지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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