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면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1651년 출간된 '리바이어던'에서 사회 상태 밖에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무질서와 전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선 '사회계약'과 '주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둘은 인류의 자연 상태에 대한 해석은 달랐지만 사회 계약과 근대국가의 출현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한 것은 비슷하다. 현대 정치 철학가와 역사가들도 대부분 루소나 홉스의 후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수렵 채집인 무리를 정치적 자의식 없는 유인원으로 취급한다. 이들 모두 '사냥 채집 사회→농업→국가 형성→계층화'라는 사회 진화 도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간 '모든 것의 새벽(원제 The dawn of everything)'은 기존의 인류 문명 발전 담론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도발적 저작이다. 역사·인류학·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불평등은 문명화의 필연적 대가가 아니다"고 주장한다. 저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예일대와 런던정경대에서 인류학 교수를 역임했다. 2020년 59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이 책이 유작으로 남았다. 공동 저자인 데이비드 웬그로는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고고학연구소 비교고고학 교수다.
이들은 수렵 채집인도 정치적 자의식을 갖춘 인간이었다고 주장한다. 유라시아 서부에서 발견한 빙하 시대 수렵 채집인들의 화려한 무덤과 장신구, 튀르키예 남동부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한 거대한 구조물은 농경시대 이전에도 대규모 집회와 협력적 건축이 가능했으며 농업 없이도 복잡한 사회와 지위, 계급, 세습 권력이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북극권의 이누이트족은 여름에는 소규모로 쪼개져 수렵 채집을 하면서 강력한 가부장제를 작동시키는 반면 겨울에는 한데 모여 평등한 집합적 삶을 산다. 계절에 따라 통치체제를 바꾸며 정치적 실험을 했다.
사유재산은 농경으로 인한 잉여 생산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는 종전의 주장도 배격한다.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권은 신성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다. 제의에 사용되는 신성한 물건은 세상과 격리되어 보존된다. 어떤 물건이 '내 것'이 되는 순간 그것은 타인의 손길에서 격리되어 나의 절대적 권한 아래 놓인다. 사적 재산 개념과 신성 개념은 모두 본질적으로 배제의 구조를 띤다.
더 놀라운 것은 민주주의와 자유·평등의 이념도 유럽 계몽주의 지식인이 아니라 아메리카 선주민에게서 발원했다는 주장이다. 스페인 문헌에 따르면 16세기 아즈텍에 대항해 틀락스칼라와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스페인인들은 틀락스칼라의 민주적 사회 운영 시스템에 감명받았다. 당시 유럽인들은 거의 모두 반민주적이었기 때문에 중앙아메리카의 만남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가능성이 있다는 추론이다.
총 900쪽이 넘는 '벽돌책'엔 유럽 중심주의 역사관을 해체하는 새로운 고고학·인류학 증거들로 빼곡하다. 지적이고 대담한 여정이지만 기존 역사관을 전복시키기에는 아직 고고학적 증거가 뚜렷하지 않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다만 인류가 과거에 다양한 사회모델과 협력 방식을 실험했듯 미래 역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강력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향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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