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죽이고 살리는 마녀재판
“거짓을 말하고 살아남을까
아니면 진실을 말하고 죽을까”
4월 27일까지 예술의전당

사방이 막힌,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벽이 우뚝 세워진 무대. 이곳에서 엄기준, 김수로, 박은석, 류인아 등 연기파 배우들이 막힘 없이 대사를 계속 쏟아낸다. 관객들도 처음에는 귀 기울여 듣다가 나중에는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길을 잃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진술, 증언, 자백 등 말 하나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는 마녀재판을 위해 이러한 빌드업이 필요하다.
6년 만에 돌아온 연극 ‘시련’은 ‘세일즈맨의 죽음’ 등을 쓴 세계적인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의 대표작 중 하나다. 마녀사냥을 통해 집단적 광기와 정치적 조작을 통해 파괴되는 비극적인 개인의 삶을 그려냈다.
‘시련’은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실제로 일어난 마녀재판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마을의 소녀들이 숲 속에서 춤을 추며 벌인 장난이 세일럼 마을을 뒤집어 놓는다. 이 진상을 밝히고 악마와 마녀를 찾아내기 위해 마을에선 재판이 벌어지고 소녀들은 마녀를 색출하는 신의 도구로 선택받는다. 평판 높은 존 프락터는 이 모든 게 소녀들의 거짓말임을 알고 있지만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마녀 혐의로 고발되면서 재판에 휘말리게 된다.
연극은 1953년 미국에서 초연됐다. 1950년대 매카시즘 시대의 광기를 비판하기 위해 마녀재판이라는 소재가 활용됐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세일럼 마을에 살고 있다’는 이번 연극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집단적 광기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가짜 뉴스와 악플로 사람을 죽이거나 살린다. 연극은 ‘거짓을 말하고 살아남을 것인가, 진실을 말하고 죽을 것인가’라고 물으며 관객들로 하여금 진실과 정의, 양심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극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기괴하다. 무대를 둘러싼 하얀 벽면은 등장인물을 두드러지게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가둔다. 군더더기 없는 무대의 조명과 음악은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는데, 마치 공포영화와 같다. 관객은 180분 동안 팽팽한 긴장감 속 메스꺼운 답답함을 느낀다. 소녀 6명이 눈 뒤집힌 채로 관절이 꺾이는 기괴한 움직임을 보여줄 때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시련’은 배우 총 23명이 출연하는 대작이다. 다양한 캐릭터가 180분 동안 촘촘하게 무대에 등장하며 세일럼 마을의 광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연극·뮤지컬, 영화·드라마 등 모든 장르를 막론한 실력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엄기준, 강필석, 김수로(프로듀서 겸), 박은석, 남명렬, 진지희 등 실력파 배우들과 한국 연극계를 이끄는 신유청 연출이 의기투합했다.
약 3주 간 공연되는데 주인공 존 프락터 역에만 배우 2명이 캐스팅됐고 나머지 배역은 모두 배우 1명이 맡았다.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고발하며 아내와 마을 사람들을 지켜내려는 존 프락터 역은 엄기준, 강필석이 맡았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며 권위의식과 물질적 탐욕이 가득한 사무엘 패리스역은 박은석,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진실을 파헤치는 목사 존 헤일 역에는 박정복이 캐스팅됐다.
진실보다 자신의 권력을 중요시하는 댄포스 역에 남명렬과 존 프락터에게 집착하며 마녀 사냥을 주도하는 애비게일 윌리엄즈 역은 류인아가 이름을 올렸다. 선하고 순종적인 존 프락터의 아내 엘리자베스 프락터 역에는 여승희, 존 프락터의 하녀로 애비게일과 악마를 불러내는 놀이에 참여하는 메어리 워렌역에 진지희가 무대에 오른다. 오는 4월 27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