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빌리어드뉴스 MK빌리어드뉴스 로고

[매경춘추] 쉬지 말 것

  • 기사입력:2025.10.01 17:56:50
  • 최종수정:2025-10-01 22:27:20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사진설명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던 2년 전 이맘때쯤 코미디언 이경규와 인터뷰했다. 그때 나는 장수의 비결을 물었다. 개인적으로 나도 막막해하고 있었기에 궁금했다. 나는 오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오래 일할까. 그래서 분야는 달라도 뭔가 만들어내는 분야의 선배라 생각하고 여쭌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그날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잠깐 생각하다 답했다. 자리를 비우지 말라.

그는 자신이 다쳐서 남이 자신을 대신하게 둔 적이 없다고 했다. 몸이 다칠까봐 조기 축구도 안 한다고 했다. 그는 축구선수를 사위로 두어서인지 축구에 비유해 말을 이었다. 축구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부상을 안 당하는 거라고. 다치면 안 되고, 쉬면 안 된다고. 나는 그 말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예상 밖이면서도 너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래퍼 개코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쉬면 안 된다'는 말을 떠올렸다. 개코는 음악을 쉰 적이 없다. 분야를 가린 적도 없다. 래퍼들이 한때 비웃던 한국 발라드 사이의 '발라드 랩'도, 유행에 맞춘 랩도, 드라마 주제가의 랩도 계속했다. 그 결과 그의 캐릭터가 흐려졌을까. 아니다. 개코는 어느 무대에서 어떤 사람과 어느 노래에 랩을 해도 어울리는 한국 최고 반열의 래퍼가 되었다.

개코는 2024년 한국 힙합 1세대인 가리온의 노래에 랩을 했다. 올여름엔 '한한령 이후 최초의 중국 공연'에 성공한 젊은 힙합 그룹 호미들의 노래에도 랩을 했다. 이렇게 다양한 노래에 랩을 해도 가치를 유지하는 래퍼는 개코뿐이다. 나는 그 비밀 중 하나가 이경규의 말에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

올가을 돌아온 대형 가수도 많다. 브라운아이드소울은 6년 만에, 신승훈은 10년 만에 신보를 냈다. 둘 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멋지게 노래를 부른다. 맑은 목소리도 선박 엔진처럼 힘 있는 가창력도 똑같다. 그래서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훌륭한 노래임이 확실한데 묘하게 타임캡슐에서 바로 꺼내 온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도 신곡을 한 번씩 내는 이문세나 은퇴 직전까지 '카톡' 같은 제목의 신곡을 냈던 나훈아와는 다르다.

누가 더 위대하다는 우열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뭔가 만들어내는 자로서 동시대와의 호흡이 중요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때 위대했어도 시대와 계속 함께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시대와 멀어진다. 남 보는 걸 만드는데 시대와 멀어지면 곤란하다. 더구나 지금은 찰나의 순간에도 온갖 스트리밍 서비스와 유튜브에 새로운 콘텐츠가 사실상 무한정으로 올라온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듯, 한 번 멈추면 이끼가 끼는 속도도 그만큼 빨라진다.

최근 별세한 전유성은 생전 어느 인터뷰에서 '노후 대비는 일'이라는 말을 남겼다. 지금은 수명이 길어지고 인공지능(AI) 등으로 노동생산성이 높아졌다. 생활이 해결된 다음엔 인간의 남는 시간을 채워줄 삶의 의미가 점차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일은 금전적 노후 대책뿐 아니라 삶의 허무를 막고 삶의 의욕을 높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이경규의 말 역시 특정 직군을 넘어서는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쉴 때 쉬되, 잘 일하기 위해 잘 쉬는 사람들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그렇게 된 것 같지 않은가.

[박찬용 에디터·칼럼니스트]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