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원전 초석을 놓은 이승만, 박정희의 공은 잘 알려져 있다. 이승만은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 되던 시절에 원자력 연구소를 세우고 230명을 미국, 영국 등에 국비로 유학 보냈다. 박정희는 1971년 고리 1호기부터 원전 건설을 실천에 옮겼다. '원자력 기술 자립'을 이룬 전두환의 공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원전 1기에서 10기까지는 '턴키' 방식이었다. 외국 회사에서 지어주면 우리는 열쇠만 건네받았다. 그렇게 10년을 하니 눈치가 트였지만 원자로 등 핵심 기술은 요령부득이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박정기는 전두환 대통령의 대구공고, 육사 3년 후배였다. 기술 전수 조건만 보고 업체를 선정하겠으니 바람막이가 되어달라는 후배의 청에 전두환은 군말 없이 오케이했다. 이전까지 한국 원전 건설을 독점해 온 미국 회사들의 입김은 강력했고 한전 사장이 저항할 수 없는 정권 실력자까지 민원을 넣어 왔다. 너무 집요해 다시 대통령을 찾아갔다.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 "당장 손 떼시오."
박정기의 말이다. "대통령은 기술 이해도, 결단도 빨랐다. 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여파로 원전 발주 씨가 말랐던 시절이었다. 지금 돈으로 20억달러짜리 수주였으니 유수 업체들이 굶은 사자 떼처럼 달려들었다. 겹친 우연이 도왔다." 필자가 볼 때 그 우연에는 박정기 본인도 들어가야 한다.
박정기는 박정희 정권 때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중령을 끝으로 군복을 벗었다. 중견 건설회사에 취업해 5년간 중동에서 한국인 노무자 1000명을 데리고 일했다. "우리는 살인적 더위와 싸우는데 외국 감리회사 직원들은 에어컨 켜진 방에서 펜만 들고 일했다. 기술이 한이 됐다. 한전 사장으로 와보니 원전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더라. 기술이 없으면 돈을 주고도 을이다. 그 갑을 관계를 끝장내야 했다."
한국이라는 건물을 떠받치는 몇 개의 큰 기둥이 있다. 자유민주주의, 한미동맹, 제조업 중심 수출경제, 우수한 이공계 인력과 함께 원자력도 들어간다. 이 건물 설계에 기여한 비중을 따지면 이승만, 박정희가 압도적이지만 그 뒤에는 대통령에게 청사진을 제시하고 결단을 이끌어내는 '하위 설계자'들의 역할이 있었다. 중공업 건설을 입안한 오원철, 5공 경제정책을 설계한 김재익 등이 대표적이다. 박정기는 원전 자립의 설계자였다.
근래 한국 성장 퇴조는 설계자들이 드물어진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랜드 플랜'을 본 지 너무 오래됐다. 기왕의 큰 기둥들은 흔들흔들한다. 한미동맹도, 제조업도, 이공계도, 원전도…. 구순인 올해 증손들을 위한 삶의 지침서('어느 증조할아버지의 평범한 이야기')를 출간한 왕성한 필력의 박정기 씨에게 '선생 세대의 설계가 한계에 온 것인가, 아니면 아래 세대의 문제인가' 하고 물었다.
"우리 세대는 빵에 급급한 나머지 국민의식, 도덕성 고양에 신경을 못 썼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선진사회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정치 리더십이다. 그건 국민의식 문제다. 한 사회가 빵만으로 고양되지는 않더라." 눈에 안 보이는 의식 수준까지는 계산하지 못했다는 설계자의 후회를 자식 세대인 나는 원망할 수가 없다. 같은 짐을 아들에게 물려줄 형편이라.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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