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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래 가장 뜨거운 韓日 로맨스[노원명 에세이]

  • 노원명
  • 기사입력:2025.06.22 08:02:40
  • 최종수정:2025.06.22 08: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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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뉴오타니호텔 도쿄에서 열린 주일 한국대사관 주최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박철희 주일 한국대사, 기시다 후미오 전 일본 총리 등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뉴오타니호텔 도쿄에서 열린 주일 한국대사관 주최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박철희 주일 한국대사, 기시다 후미오 전 일본 총리 등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메이지 시대 조선 전문가 혼마 규스케는 1893년 조선 땅 곳곳을 정탐하고 돌아갔다. 귀국 후 신문에 연재한 ‘조선잡기’에서 그는 한국 선비 두 명과 임진왜란을 두고 필담으로 논쟁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 양측은 임진왜란의 승자가 누구인가에서 조차 의견이 갈렸다. 혼마의 말이다. “어찌 임진의 일을 가지고 폐방(일본)을 적국시할 필요가 있는가. 귀국(조선)이 이 일을 들어 폐방을 원망하면 폐방 역시 귀국을 원망할 것이다. 원나라가 와서 노략질할 때 귀국은 이것을 인도하지 않았는가. 귀국은 일찍이 우리 쓰시마를 모두 죽이려 하지 않았는가.” 몽골의 일본 원정 때 고려가 가이드를 선 것과 세종 1년의 대마도 3차 정벌을 따지면서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은 한일이 견원지간이 된 결정적 계기였지만 그 이전에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썩 돈독했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는 유사 이래 중국과 밀접한 관계였다. 한중 사이에 조공 관계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명과 조선 초기인 15세기 전반의 일이다. 그러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사례에서 보듯 한반도에 있어 중국의 영향은 태생적, 운명적인 측면이 있다. 한반도가 중화문명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면 일본은 그 권역의 경계 혹은 바깥에 있었다. 천하 체계를 공유하는 중국과 한반도에 있어 일본은 주변부 섬나라일 뿐이었고 일본과 관련된 문제는 근해를 교란하는 왜구 정도였다(쑹녠선,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한반도는 문화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얻을 게 별로 없었던 일본에 냉담했다. 특히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랬다. 쑹녠선에 따르면 조선의 ‘소중화’ 의식은 만주족이 중원을 점령한 청 건국 이후 생겨났다는 통념과 달리 명나라에서 양명학이 유행하던 시절에 형성됐다고 한다. 조선 지식인들은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이설에 심취한 대륙의 지식인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소중화 의식은 ‘중국 다음은 우리’라는 서열 의식이 아니라 ‘정주학(程朱學)’의 진정한 계승자는 한반도라는 인식이다. 그런 거대 자아를 소유했던 조선인들에게 일본이 눈에 보였을 리 없다.

그건 일본 쪽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원나라 초기에 중국을 상대로 조공을 중단했다. 그러다 1402년에 이르러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명나라 영락제에게 ‘일본국왕’ 책봉을 요구해 받아냈다. 무역상 필요 때문이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중화 문명에 대한 동경과는 별개로 같은 ‘황제국’으로서 일본은 중국과 대등하다는 게 일본인의 기본 세계관이었다. 그런 일본인 눈에 중국의 속방인 조선이 들어왔을 리도 만무하다.

피차 소 닭 보듯 냉담한 관계로 지내오다가 1592년에 이르러 터진 전쟁은 1598년까지 7년을 갔다. 무참한 살육과 파괴가 있었고 양국 간 감정은 냉담에서 증오로 바뀌었다. 그래도 상흔의 크기에 비하면 관계 회복은 빨랐다.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것을 계기로 1609년 기유약조가 체결되면서 전쟁 이전의 교린 관계로 돌아갔다. 대마도가 중개하는 3각 무역이 재개되었고 새 쇼군이 취임할 때 마다 조선은 축하 사절로 통신사를 보냈다.

이 시절의 교류를 바라보는 양국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조선은 일본에 정나미가 떨어졌지만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건 막아야겠기에 외교 재개를 택했다. 대신 교역은 대마도를 중간에 끼는 조건으로만 허용했고 일본인은 부산의 왜관을 벗어나 북상할 수 없었다. 당대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오는 통신사를 네덜란드 등 제3국 사람들에게 “(임진왜란에서) 히데요시의 승리를 축하하러 온 조공사절단”이라고 소개했다(마리우스 B. 잰슨, ‘현대 일본을 찾아서’). 아마 상당수는 실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1719년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 통신사 수행원 신유한은 일본 측 파트너와 날 선 대화를 주고받았다. 먼저 일본인이 “우리는 조선을 친근하게 대했는데 왜 조선의 책자에는 우리를 여전히 왜구라고 하느냐”고 따진다. 신유한은 “임진왜란 이후에 쓰인 책자라서 그런 것”이라 설명하면서 “그러는 당신들은 왜 우리를 ‘도진(唐人)’이라 부르느냐”고 반격한다. 도진은 당시 일본인이 외국인을 상대로 쓰던 멸칭이었다. 겉으로는 존중하는 듯, 속으로는 믿지 못하는 양국인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하다.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의 200여년에 걸친 교린은 일본이 먼저 개국을 하고 메이지유신에 성공하면서 끝이 났다. 일본은 후발자 특유의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한반도를 열강, 특히 러시아가 차지하면 일본 열도가 위험해진다는 공포가 한때는 정한론으로, 한때는 조선의 자강 지원론으로 노이로제적 변덕을 보이더니 결국 한반도 병탄으로 귀결되었다. 이후 상황 전개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지난 1000년간 한일은 기본적으로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가 예외적으로 관심이 생길 때 마다 파괴적 관계로 돌변하곤 했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한일병탄이 그랬다. 그 관계가 1945년 일본 패망으로 일단락됐다. 1965년 국교 재개 후 최근 60년간 한일은 때로는 과거사, 때로는 독도를 놓고 대립했지만 양국이 이처럼 밀접하고 대등하며 평화적으로 교섭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지난 19일 일본 도쿄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이 개최한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리셉션’에 이시바 시게루 총리를 비롯한 일본 내각 서열 1~4위, 또 전직 총리 3명이 총출동해 화제가 됐다. 갓 출범한 이재명 정부와의 관계 설정을 고려한 성의 표시겠지만 한일 파트너십이 중요해지는 시대 흐름이 더 근본적이다.

필자는 유사 이래 경험하지 못한 ‘한일 로맨스’가 향후 몇십년간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양국의 지정학적 이해가 일치하고 있다. 중국이 동북아시아 지역 패자가 될 때 똑같이 고통을 겪을 나라가 두 나라다. 한국이 중화 문명의 일익을 자부하던 시절은 100년도 훨씬 전 얘기다. 현대 한국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에 문명적 동질감을 느낀다. 핵 보유 북한에 느끼는 위협과 혐오의 정도도 양국이 비슷하다. 지난 60년간 한일은 미국의 애정을 더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다. 대미 관계가 좋으면 한일 관계는 큰 변수가 못됐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애정을 주기보다 닦달하기 바쁘다. 예전의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한일이 밀착해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둘째 한국의 국력이 커졌다. 일본은 한국을 무력 침공할 수 없고 한국은 일본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둘은 지역 패권을 놓고 경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다.

셋째 경제적으로 한일은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한국은 대형 제조업이 강하고 일본은 우리가 못 만드는 소재·부품·장비를 만든다. 경쟁도 하지만 보완 성격이 강하다.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시장통합, 분업의 시너지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넷째 의식 못 하는 사이 서로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고 있다. 올해 4월까지 일본에 간 한국인은 322만여명으로 올해 연간 1000만명 돌파가 예상된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전년 대비 39.2% 증가했다. 이렇게 오가는 데야 정치 요인으로 인한 관계 경색에는 한계가 있다.

조선 초 명신이자 일본통으로 ‘해동제국기’를 썼던 신숙주는 “일본과 척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은 5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몇 배 더 절실하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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