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보스턴에서 골프를 할 때였다.
페어웨이에서 카트를 끌고 티샷한 내공 방향으로 가는데 옆 홀에서 경기하던 미국인이 공을 찾으러 왔다. 멀찍이서 묻길래 당연히 내공(My ball)이라고 말했다.
한참 찾다가 허탕을 치고는 결국 그가 페어웨이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근처 러프에 동일한 종류 다른 공이 보였다. 내가 마킹한 공이었다.
이미 그는 가버렸고 미안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심으로 공을 찾다가 아쉬운 모습으로 떠나는 그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미국 골프장에서는 분실된 공을 찾기가 눈을 씻고 봐도 힘들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골퍼들이 어찌나 정성스레 공을 찾기 때문이다.
간혹 OB가 난 방향으로 가서 공을 호주머니 가득 주워 오는 우리와 딴판이다. 헌 공을 잃고 브랜드 새 공을 주우면 오히려 기분이 좋다.
공이 별거냐 생각할지 모르나 중요도에 있어서는 사실 클럽과 동등하다. 이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경기는 불가능이다.

아마추어 가운데 경기 도중 간혹 공을 모두 잃어버려 캐디나 동반자에게 손을 내밀면 보통 후하게 베푼다. 드물지만 프로 선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지난달 춘천 라비에벨 컨트리클럽 듄스 코스(파71)에서 열린 코오롱 제67회 한국오픈 2라운드에서 해프닝이 발생했다. 디펜딩 챔피언인 김민규는 9번 홀을 마치고 보유한 모든 공을 소진해 더 이상 경기를 이어가지 못해 기권했다.
10번 홀에서 경기를 시작한 그는 18번 홀까지 9개 홀을 돌며 트리플 보기, 더블 보기, 보기 등을 잇달아 범해 총 8타를 잃었다. 경기 도중 OB 구역과 연못 등에 공 6개를 모두 날려버려 9개 홀을 지나고는 칠 공이 없어 결국 백을 쌌다.
골프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 프로 선수는 18홀 동안 경기하며 제조사와 모델이 같은 공을 사용해야 한다.
일명 ‘원 볼 룰(One Ball Rule)’인데 공이 다 떨어지면 동반자에게 빌리거나 골프장 내 프로 숍에서 사야 진행을 이어갈 수 있다.
은퇴한 김하늘도 이런 경우를 당했다. KLPGA 투어 8승, JLPGA 투어 6승 보유자인 그는 2009년 용인 레이크사이드CC 동코스에서 열린 서경오픈 1라운드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평소대로 공 4개를 챙겨 나갔는데 4번 홀 OB에 이어 12번, 15번, 16번 홀에서 티샷한 공이 모두 물에 빠졌다. 당시 2008년형 타이틀리스트 프로 V1x를 사용했는데 동반자 유소연과 서희경 공도 달랐다.

절체절명 상태에서 같은 브랜드 공을 가지고 있던 한 갤러리에게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고 라운드를 마쳤다. 그는 이후 대회부터 공을 두 배나 많은 9개를 챙겨 나갔다고 한다.
드물지만 외국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미국의 잭 반스(Jeff Banz)는 2000년 PGA 투어 Q스쿨 1차 예선에서 연달아 워터 해저드에 공을 빠뜨려 결국 모든 공을 다 잃어버렸다.
자기 골프백에 공이 더 이상 남지 않자 규정에 따라 경기를 중단했다. 이로 인해 그는 실격(DQ, Disqualified) 처리됐다.
타이거 우즈도 공식 대회에서 그런 적은 없었지만 연습 라운드에서 너무 많은 공을 빠뜨리자 캐디가 여분 공을 가지러 간 일화가 있다.
아마추어는 초보가 아니라면 공을 9~12개 정도 충분히 준비하는 게 좋다. 특히 해저드나 난코스가 많은 골프장에서는 여유 공을 확보한다.
프로 선수들은 대개 3~6홀마다 골프공을 교체한다. 그래서 4~6개 정도면 무난히 경기를 치른다. 물론 개인적인 습관, 경기 상황, 날씨 등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공을 바꾸는 이유는 표면 손상을 방지하면서 공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 골프공에는 스핀, 방향, 비거리 등에 영향을 미치는 딤플(dimple)이 매우 중요하다.

클럽 페이스나 벙커샷 등으로 인해 딤플이 손상되면 성능 저하를 불러온다. 특히 프로 선수에게는 작은 딤플 손상이라도 샷 정확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음으로 정신적 루틴 때문이다. 몇 홀마다 공을 바꾸는 것은 루틴이나 리듬 유지를 심리적인 이유이다. 가령 실수한 후에 기분 전환을 겸해 공을 바꾸기도 한다.
세계 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Scottie Scheffler)도 다른 선수와 마찬가지로 3~6홀마다 공을 교체한다.
그는 타이틀리스트 Pro V1 골프공을 사용한다. 이 공은 부드러운 우레탄 커버 내부에 낮은 스핀의 레이어(층)를 갖춰 예측 가능한 비행과 스핀을 제공한다.
흥미롭게도 공식 후원 선수로서 드라이버, 페어웨이 우드, 퍼터 등 대부분 클럽은 테일러메이드 제품이지만 공은 타이틀리스를 사용한다.
얼마나 공을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다. 클럽을 바꾸면 해당 클럽만 연습하면 되지만 공을 바꾸면 모든 클럽을 다시 연습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셰플러는 지난해 9개 타이틀을 획득하며 PGA 투어에서 승률 42.9%를 올렸고 올해는 PGA챔피언십을 포함해 시즌 3승 중이다.
아마추어에게 골프공은 다른 용품에 비해 저평가된 것 같다. 정성스레 치고 소중하게 다뤄 빈손으로 남는 경우가 없도록 해야겠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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