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서울에서 올트먼과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만났을 때 삼성이 챗GPT용 단말기를 개발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삼성엔 아이브의 연필이 없다. 신이 태초에 인간의 눈·코·입을 그려 넣듯 하얀 종이 위에 선을 쓱쓱 그어 개념을 창조해내는 신의 연필! 이 연필은 미국에 가장 많고 일본과 유럽연합(EU)에서 간혹 보인다. 제조 굴기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중국엔 아직 없다. 그들은 미국이 연필로 그려낸 개념을 최고 가성비로 제조해내는 단계다. 역시 그 단계를 못 벗어난 한국은 중국에 탈탈 털리는 중이다.
인수 기간도 없이 오늘 대통령에 취임하는 이재명 당선인 앞에 놓인 과제가 많다. 필자는 그 첫 번째가 대한민국을 위해 몇 자루의 연필을 깎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 제조업에 개념 설계 능력을 더하는 일이다. 삼성전자는 위대한 기업이지만 그들이 만드는 것 중 대체 불가능한 것은 없다. 네덜란드 ASML이 만드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대체 불가능하다. 일본엔 이보다 작아도 역시 대체 불가능한 소재·장비·부품 기업이 여럿 있다. 한국 위기의 본질은 이런 기업으로의 '등업'이 몇십 년째 안 되는 데 있다.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평균 국민 아이큐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나오는 세계적 혁신은 미국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혁신의 주체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어서 1000만명의 평균 아이큐는 의미가 없다. 그 안에 일론 머스크나 젠슨 황이 있을 확률이 중요하다. 미국이 지금 자리에 있는 것은 천재의 백분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는 대학이 각국 인재를 싹싹 끌어간 탓이 크다. 그 점에서 외국인 유학생에게 담을 쌓는 트럼프는 미국의 경쟁력을 근본에서 해체하고 주요국들의 인재 확보 및 혁신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그 경쟁 대열에 한국이 낄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천재는 태어난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과 노동 시스템은 천재에게 인센티브가 되지 못한다. 아이브가 한국에서 태어나 공부를 잘했으면 의사가 됐을 것이다(지난 수십 년간 배출된 한국 의사 중 몇 명은 공대에 갔더라면 젠슨 황이 됐을지도 모른다). 산업디자이너가 됐다고 한들 아이폰과 비슷한 것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초과 근무를 금지한 주 52시간 체제에서 몰입은 툭툭 끊겼을 것이고, 똑같은 생각만 하는 동료와 상사는 기상천외한 그의 발상을 '튄다'고 흉봤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노력과 경쟁을 조장할 뿐 경쟁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은 정치다. 근래 한국 산업이 퇴조하는 것은 방향 설정에 실패한 탓이 크다. 천재가 공대에 가는 것이 다시 디폴트값이 돼야 하고 노동 규제는 창조의 원천인 몰입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며 연공서열에 창의가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 이걸 바로잡으려면 교육과 노동 쪽에서 수술이 필요하다. 이 당선인이 그걸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한국도 몇 자루의 연필을 깎을 수 있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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