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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구중궁궐에 숨어 사는 대통령은 사양

日총리 일정 매일 분 단위 공개
언론에 답변할 의무 있다보니
사람 만나는지 아닌지 바로 드러나
제왕적 대통령제 韓, 소통에 인색
현실 눈감은 리더 늘 비극적 결말

  • 이승훈
  • 기사입력:2025.05.26 17:11:03
  • 최종수정:2025.05.26 17: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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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베 정권 때 있었던 정치권 부정 스캔들을 다룬 일본 드라마인 '신문기자'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기업인이 일본 총리와의 은밀한 만남을 추진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총리실 관계자가 "총리 동정은 매일 분 단위로 언론에 공개된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때 기자들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몰래 만났다가 들통나면 정권은 바로 끝장이다"라고 툴툴거린다.

일본에서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매일 챙기는 것 중 하나가 총리 일정이다. 일본은 분 단위로 세세하게 총리 일정을 공개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는 기본이다. '총리가 A호텔의 B음식점에서 C, D, E와 함께 18시 37분부터 21시 06분까지 저녁 식사를 했다'는 식으로 자료가 나온다.

일정이 알려지기 때문에 여기서 나눈 대화 내용도 금세 퍼진다. 언론이 참석자들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하고, 공개된 일정이기 때문에 총리실에서도 일정 부분은 답변할 의무가 생긴다. 일정이 공개되니 신임 총리의 경우 '취임 100일간 누구와 가장 많이 만났다'든가 '사람을 안 만나고 혼밥을 즐긴다' 등의 기사가 단골로 나온다. 현직인 이시바 시게루 총리도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고 관저로 바로 퇴근한 것이 문제가 됐다. 최근 들어서는 외부인과의 식사를 늘리고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는 일정을 보여주고 있다.

총리 일정뿐 아니라 정부는 별도의 소통 창구도 확실히 보장하고 있다.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관방장관은 하루 두 번 기자들을 만나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한다. 기자회견은 인터넷 생중계로 누구나 볼 수 있다. 정부 정책에 대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게 총리실의 설명이다.

민감한 질문이 나오면 관방장관이 애매한 답변으로 이를 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본 국익이 달린 문제라면 관방장관의 목소리는 힘을 받는다. 미국의 관세 부과나 한국과의 외교적 마찰 등에서 상대국에게 불편한 언사도 거침이 없다.

정부의 업무를 책임지는 관료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일본의 각료회의 뒤에는 항상 담당 장관이 현안에 대해 기자회견을 가진다. 민감한 사안이 있더라도 장관이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국민에게 정책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창구를 닫는 것은 제대로 된 정치인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게 일본 정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제왕적 대통령을 가진 우리는 소통에 인색하다. 밀실 외교, 밀실 정치는 모든 정권의 단골 메뉴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기자들과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을 조금 가지다 본인에게 민감한 질문이 반복되자 폐지해 버렸다.

장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언론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부처가 추진하는 정책을 국민 눈높이에 맞게 설명하는 사람을 그동안 보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정책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비전문가를 장관으로 기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모르는 게 많을수록 가장 무서운 것이 국민의 눈일 것이다.

내달 초면 대한민국에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 누가 되든지 간에 새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을 늘렸으면 좋겠다. 특히 국민이 궁금해하는 사안은 본인이 직접 설명하거나 정례적인 브리핑 시스템이라도 갖추면 국민의 갈증은 많이 해소될 것 같다.

구중궁궐에서 나라의 현실을 모른 채 살아가던 조선왕조는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을 비참한 삶으로 몰아넣었다. 불통으로 일관했던 정권들도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다. 새 정부의 첫 단추는 소통으로 시작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승훈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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