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이재명, 김문수, 이준석 대선 후보 [사진 = 연합뉴스]](https://wimg.mk.co.kr/news/cms/202505/25/news-p.v1.20250525.f59a54ece22a44a2ab8e4cc972174ead_P1.jpeg)
합리적 보수를 포함한 한국의 중도층에게 6·3 조기 대선은 특이한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세 가치 중 하나를 택하면 나머지 둘을 포기해야 하는 ‘트릴레마’적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선택을 주저하게 한다. 종이 울리고 답안지를 거둘 때가 되어서야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셋중 하나를 ‘찍고’ 시험장을 나올 사람들이 꽤 있을 것같다.
중도보수는 이념의 중요성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최상위에 두지는 않는다. 그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최상위 이념은 좌우가 아니라 공동체의 지속과 번영이다. 그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1%대로 후퇴한 잠재성장률, 중국에 하나하나 다 뺏겨버린 제조업 경쟁력, 대만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글로벌 AI 공급망이다. 한국은 인구가 줄고, A급 이상 인재가 이·공계에 안간지 오래다. 이것이 타개 가능한 현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시도는 해야 한다. 민주주의로 굴러가는 한 나라가 현상을 타파하는 유일한 길은 강력한 정치 리더십을 조성해 그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안간힘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지금 대통령 후보 중 당선 시 이런 리더십을 갖게 될 사람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유일하다. 그에겐 190석의 범여권 의석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10명만 더 붙으면 개헌이 가능하고 국가 시스템 정비에 필요한 기타 모든 법안의 자력 통과가 가능하다. 2028년 총선까지 최소 3년, 5년 대통령 임기 중 실제 일하는 시간 대부분을 국회의 저항 없이 보낼 수 있다. 민주화 이후 어느 대통령도 누려보지 못한 호조건이다.
여소야대하에서의 정치 파탄과 제자리걸음에 좌절했던 중도는 유혹을 느낀다. 좌든 우든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에 공명한다. 그들은 또한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때 민주당이 이 나라를 상대로 부릴 행패가 두렵다. 지난 3년간 30여차례 공직자 탄핵안을 발의한 당이고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의 대행까지 부른 당이다. 그들이 또 야당이 되면 2028년 총선까지 이 나라에 정치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느니 ‘니가 여당돼서 해봐라. 죽이 됐든 밥이 됐든’하는 심리가 작동한다. 세 차례 대통령 탄핵소추를 비롯해 대부분 정치 파행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발생했다. 혹시 아는가. 대야가 대여로 바뀌면 포악한 성질은 온순해지고 없던 애국심이 생겨날지.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0석 의석을 거느린 대통령은 국가 재도약의 기반을 닦는 ‘계몽왕’이 될 수도 있고 한국판 우고 차베스가 될 수도 있다. 계몽왕이 되려면 대통령 본인의 절제와 노력, 능력이 필요하고 국민에게 시시때때로 희생을 요구해야 하므로 인기는 떨어질 것이다. 이에비해 차베스가 되기는 쉽다. 돈을 계속 퍼주는 것, 국가부채 한도만 늘리면 된다. 인기는 올라가고 다음 총선도 이길 것이다. 어느 순간 나라는 부도난 아르헨티나 꼴이 나겠지만 그게 반드시 ‘정치적으로’ 나쁘란 법은 없다. 경제 파탄은 더 악성의 포퓰리즘을 낳는 법이다. 그런 식으로 대한민국은 아르헨티나가 되고, 다시 베네수엘라가 된다. 이것이 중도보수가 ‘이재명 대통령’에 느끼는 꺼림칙함이다.
두차례 토론회에서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고구마처럼 답답했지만 지지율은 올라가고 있다. 한국은 서양과 달라서 화려한 언변이 득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신뢰감을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김문수는 흠잡기 어려운 인생을 살았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서사가 있다. 중도층은 그의 청렴, 대의를 위해 불사른 청춘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그 비슷하게도 살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있다.
그가 윤석열을 단호히 쳐내지 않는 것이 불만인 사람들이 많지만 거기서 김문수의 장점을 확인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윤에 대한 의리 같은 문제가 아니다. 필자가 알기로 김문수는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만 신중할 뿐이다. 김문수는 1996년 부천 소사에서 ‘천하의 박지원’을 꺾고 초선의원이 됐고 경기도지사를 유일하게 연임한 사람이다. 철두철미하고 전략적이다. 선거는 한줌한줌 모아가는 게임이지, 상상속의 ‘큰 산토끼’를 위해 눈에 보이는 ‘작은 집토끼’를 포기하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안다.
나는 김문수가 대통령이 되면 국정을 매우 안정적이고 실수 없이 해나갈 자질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본인 자질외에 그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 나쁘다. 첫째 그는 대선 패배로 더 독이 올랐을 190석의 범야권을 2028년까지 상대해야 한다. 3년 임기를 공약했으니 다수 여당과 일할 기회는 영영 없다. 운이 좋으면 3년 안에 개헌은 할 수 있겠지만 확실하지 않다. 개헌보다 중요한 교육·노동 개혁을 통한 국가경쟁력 회복 드라이브를 걸 수가 없다. 앞으로 3년을 다시 제자리걸음 해야 한다는 상상은 중도층을 숨 막히게 한다. 대한민국이 버틸 수 있을까.
둘째 김문수를 택하면 국민의힘 수명이 연장된다. 그 당에는 정상배와 기회주의자들이 우글거린다. 그런 인간형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그들이 전면에서 설치는 조직의 풍토가 더 문제다. 그런 정당을 여당으로 계속 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중도와 보수를 심란하게 만든다. 차라리 이번 대선에서 심판하고 소멸시키는 것이 정신이 똑바로 박힌 보수를 세우는 빠른 길이 아닐까. 그게 중장기적으로 대한민국에 더 이롭지 않을까.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만약 이번 선거를 완주해 15% 이상 득표한다면 그로부터 정치혁명이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힘이 쪼개질 수 있고 이준석과 한동훈이 새 보수의 리더십을 놓고 경쟁하는 국면이 펼쳐질 것이다. 잘하면 내년 지방선거, 늦어도 2028년 총선에서는 국민의힘은 영남 자민련으로 쪼그라들거나 공중분해 되고 새 전국구 보수정당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이준석에게 투표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투자임이 분명하지만 당장 수익을 주지 못하고 미래 수익률 예측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 함정이다. 중도가 보기에 이준석 혹은 한동훈은 성장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신뢰를 주는 단계는 아니다. 반윤, 반이재명 말고 그들이 펼쳐 보이는 세계의 폭은 너무 좁다.
이재명을 찍으면 국가 운명을 반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베네수엘라 꼴이 날 수도 있다. 김문수를 찍으면 당장 베네수엘라 꼴은 면하겠지만 대한민국은 결정적인 몇 년을 ‘정치 부작동’ 상태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이준석을 찍으면 세상을 바꿀 새 정치운동을 키울 수 있다. 대신 대한민국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갈리는 교차점에서 차악을 택하지 못한 후회를 평생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할 놈과 좋은 놈, 바꿀 놈 사이에서의 선택 강요. 이것이 이번 조기 대선 투표장에 나가는 중도 보수층의 트릴레마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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