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사상 초유의 대선 후보 교체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위해 기자회견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https://wimg.mk.co.kr/news/cms/202505/11/news-p.v1.20250511.e0c81e54d5054f00a0c373ca812db703_P1.jpg)
국민의힘 타락한 지도부가 지난 토요일 새벽 야음을 틈타 대선후보를 찬탈한 희대의 정치 쿠데타가 하루도 가지 못해 그날 밤 당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를 민주적 회복력이라 칭찬해 주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기엔 국힘이 파 내려간 우물의 바닥이 너무 깊다. 나오려 하지 말고 그냥 그곳에서 잠들라. 그 무덤에서 새 보수라는 콩 나무가 싹을 틔워 뻗어 나오고 머지않아 숲을 이룰 것이다.
이번 대선을 이재명 대 반(反) 이재명으로 프레임 짜려던 국힘의 기획은 5월의 얼음처럼 녹아버렸다. 반이재명 프레임은 이재명에 비해 반이재명 쪽이 상대적으로 정상이라는 암묵의 동의를 전제로 한다. 국힘은 이 나라에서 가장 반민주적이고, 상식에 구애되지 않고, 철면피하며, 인격의 바닥을 알 수 없는, 그래서 도저히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괴물’이 이재명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국힘 쿠데타를 본 이재명이 “저것도 당인가”하고 비웃었다. 국힘은 죽을 때조차 우습다. 비장미는 반스푼도 없다.
‘친일파 같은 놈들’. 토요일 아침 국힘 뉴스를 본 아내가 말했다. 아내는 일본을 좋아하면서도 한국인 중에서 특정한 인간형을 지칭하는데 친일파란 용어를 쓴다. 시류를 잘 따라가고, 이익에 밝고, 권력 향배에 민감하고, 권력 앞에 납작 숙이고, 적당히 부패하고, 부자이면서 인색하고, 자식은 의대나 법·상대 보내고(현실적 가치 주입), 자식 혼사는 반드시 상향 아니면 최소 동급인 경우에만 허락하고, 손주 영어학원을 챙기는 인간형. 보통은 기득권이라고 분류될 이들을 친일파라 하는 것은 나라가 없어져도 잘 살 유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때는 친청이었고 친미였으며 친러이기도 했고 지금 북한에 있는 같은 인간형은 친김정은 노동당 간부로 살고 있을 것이다. 꺼삐딴 리! 한국에서 그런 인간형은 여의도에 많고, 국힘에 특히 많다.
요사이 나는 보수와 우파라는 용어를 구분해 쓰려 애쓰고 있다.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수 정당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보수적 인간형이 주도하는 정당이 보수정당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서 있고, 주렸다고 아무 음식이나 탐하지 않고, 부자는 아니라도 인색하지 않고, 남의 부정을 탓할 때 내게 자격이 있나 한 번쯤 돌아보는 인간형이 보수적인 인간이다. 그런 인간형이 주류인 정당은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무슨 짓이든 하지는 않는다. ‘한덕수 차출론’이란 아이디어 자체가 ‘무슨 짓이든’에 해당했는데 국힘 구성원 대다수가 경계심을 갖지 않고 부화뇌동했다. 보수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꺼삐딴 리라서 그렇다.
내 기준에서 국힘은 기득권 우파 정당이다. 한국 엘리트층의 기득권은 생래적으로 기회주의적이어서 철학이나 이념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들을 밑바닥에서 떠받치는 것은 지역주의다. 영남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당긴다. 영남인들은 ‘우리가 주류’라는 허위의식에서, 한편으로는 호남에 대한 반발심에서 기꺼이 국힘의 장원(莊園)이 되어주었다. 국힘은 장원에서 나오는 안정적 소출을 믿고 방탕을 일삼다 파산의 길을 갔다. 헌금 걷으려 주말마다 광화문에 나오는 ‘선지자’에게 급전을 빌리고, ‘부정선거 음모론’이란 약을 팔아 떼돈을 번 향정신성 의약품 사범들에게 고리 이잣돈을 빌려 쓰더니 그 약에 본인이 중독되고 말았다.
정신 놓은 국힘이 방화까지 한 것이 지난 토요일의 소동이다. 그 불이 우파의 로마를 다 태운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할 필요가 없다. 미국 옐로스톤에 가면 대형 산불이 야생의 생태계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보여주는 다큐를 틀어준다. 흙은 재를 양분 삼아 미생물을 키우고, 다시 기름져진 땅에 새 풀이 돋고, 예전에 없었던 나무 군락이 들어서고, 숲을 찾아 움직이는 큰 초식 짐승이 새끼를 낳고, 먹이사슬 꼭짓점에 있는 늑대와 회색곰이 배불리 먹는다. 국힘이 다 타고 남은 자리에 새로운 보수가 들어설 것이다. 더 웅대하고 푸르게 우거진 보수의 숲. 그러니 기둥도, 서까래도 남기지 말고 다 타야 한다. 굽고 비틀려 어차피 땔감으로나 쓸 기둥이었다.
‘이재명은 누가 견제하나’고 묻는 사람이 있다. 이재명을 만든 9할9푼의 공이 윤석열과 국힘의 것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윤과 국힘의 무도와 비정상이 이재명의 무도와 비정상을 매번 가려 왔다는 것을? 국힘이 완전히 소멸하고 새 보수운동이 약동하는 시점에 이재명의 위기가 시작된다. 가림막이 없어지면 알몸이 드러난다. 알몸으로 지방선거, 총선을 치를 수는 없다. 새로 태어난 보수정당과 경쟁하려면 이재명의 민주당도 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 보수정당이 서면 민주당도 바로 서는 상호작용. 그 결과가 대한민국 정상화다. 미련 없이 보낸다. 국힘. 그동안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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