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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 상태로 맞이한 젊은 여인…암살자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39) 장 폴 마라의 죽음

  •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 기사입력:2025.05.09 13:09:24
  • 최종수정:2025.05.09 1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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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장 폴 마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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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로 가득한 욕실. 50세 중년 남자가 나른한 표정으로 욕조에 몸을 담근다. 건강 걱정, 나라 걱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욕실 문을 두드린다. “들어오세요.” 처음 보는 젊은 여성. 아름다운 얼굴에는 윤기가 흐르고 눈에는 총기가 가득하다.

욕실 증기에 어쩐지 야릇한 기운이 감돈다. 문 닫힌 욕실에서는 두 사람 사이 대화만 나지막이 들려왔다.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이윽고 들려온 남자의 비명. 놀란 사람들이 욕실 문을 열자, 욕조에는 선홍빛 핏물이 가득하다. 남자는 가슴에 피를 흘린 채 고개를 축 숙이고 있었다. 젊은 여성의 표정은 누구보다 당당했다.

욕실에서 급작스러운 테러를 당한 남자의 이름은 장 폴 마라.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파의 거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 정치를 더욱 혼란으로 밀어넣었다.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남긴 가장 유명한 그림 ‘마라의 죽음’이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마라가 흘린 핏물은 프랑스 전역을 극단주의로 물들인 촉매로 작용했다.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는 이 시기, 그날의 흔적과 기억을 쫓는다.

급진 혁명을 주장하던 장 폴 마라

여성과 어린이, 한때의 동지도 ‘처형’

장 폴 마라. 그의 별명은 ‘인민의 벗’이었다. 민중의 고혈을 뽑아먹는 고관대작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기 시절, 그는 혁명의 기수였다. 당시 루이 16세 체제를 뒤엎어버리겠다는 프랑스 시민들 결기는 대단했다. 프랑스 절대주의 왕정은 시민의 분노 앞에선 모래성과 같았다. 그 선봉에 장 폴 마라가 서 있었다.

혁명이라는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조직은 여러 갈래로 찢겨 있었다. ‘왕정은 안 된다’는 목표만 공유할 뿐 각자 방향성이 달랐던 탓이다. 루이 16세 처형부터 혁명의 속도, 정책 방향까지 모든 방면에서 의견이 갈렸다.

크게는 극단적 급진파인 ‘몽테뉴파’와 온건파인 ‘지롱드파’로 나뉘었다. 혁명 직후 개설된 국민제헌의회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산의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몽테뉴파라고 불린 이들은 적극적으로 ‘혁명의 완성’을 주장했다. 더디 갈수록 왕정주의자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표적인 인물이 그 유명한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장 폴 마라였다.

장 폴 마라의 또 다른 이름은 ‘피의 사나이(Sanguinaire)’였다. 세상을 뒤엎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도 주저하지 않아서다. 그가 단두대에 올린 건 왕정주의자만이 아니었다. 혁명의 속도 조절을 주장하던 온건파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한때는 동지라고 부르던 사람들이다.

혁명 기간 그는 파리의 하수도에서 몇 날 며칠을 숨어 지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쥐와 쓰레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피부에 딱지가 덕지덕지 앉았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직접 발행한 신문 ‘인민의 벗(L’Ami du Peuple)’에서 마라는 얘기했다. “(반대파의) 머리를 베어 그들의 검은 죄악을 피로 씻어내자.” 누군가가 지나친 숙청을 우려하면 그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들을 1000명 죽이는 것이 1000만명의 민중을 살리는 것”이라고.

고성(高聲)은 언제나 이성을 몰아내기 마련이다. 정치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로베스피에르와 장 폴 마라의 극단적 메시지를 민중은 가슴에 품고 뼈에 새겼다. 파리 시내에서 왕당파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향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1792년 9월 일어난, ‘9월 학살’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왕당파와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 혁명의 파고를 막으러 진군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들의 공포심을 부른 배경이었다. 희생자에는 어린이와 여성도 포함돼 있었지만, 홍위병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죽은 이들 모두가 혁명의 적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장 폴 마라는 한발 더 나아간다.

“국민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반역자들을 칼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

급진파에 환멸 느꼈던 여성 샬럿 코르데이

마라 가슴에 칼 꽂았지만…정세는 극단으로

혁명에 핏자국이 선명해질수록 불안은 커져간다. 와인 생산지로서 부유함과 넉넉함을 자랑하던 도시, 보르도의 지롱드에서 온 사람들 중심으로 온건한 사람들이 세력을 규합했다. ‘지롱드파’다. 하급 귀족 출신 젊은 여성 샬럿 코르데이. 철학과 정치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혁명의 목적에 공감했고 방법론에 있어서는 온건한 지롱드의 손을 들어줬다. 의견이 다르다고 칼부터 들이미는 그악스러운 몽테뉴파에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껴서다.

1792년 9월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고, 이듬해 1월 루이 16세의 목이 잘렸다. 코르데이는 생각했다. 혁명의 정신이 오염되고 있다고, 그들은 그저 피에 굶주린 살인귀로 변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10만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녀에게 혁명의 적은 루이 16세와 같은 왕족이 아니었다. 폭력과 피에 굶주린 극단파, 그리고 그 수뇌부 장 폴 마라였다.

“도망친 지롱드파의 위치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봉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장 폴 마라에게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도망친 정적들 위치와 그들의 계획을 알고 있다는 첩보. 1793년 7월 13일 저녁 7시 파리. 한 마차에서 젊은 여인이 내렸다. 샬럿 코르데이였다. 저택의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안내인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녀를 욕조로 안내했다. 문을 열자 머리에 두건을 두른 초췌한 중년의 남성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피부병이 심했던 그는 목욕하면서 업무를 보는 ‘약욕’을 즐겼다. 그녀가 종이를 꺼내 건넸다. 그의 눈길이 종이에 멈춘 사이, 그의 가슴팍에 무언가가 꽂혔다. 칼이었다. “도와줘”라는 짧은 비명과 함께 그는 숨을 거뒀다. 민중의 친구이자 피의 사제라고 불렸던 사나이, 장 폴 마라의 죽음이었다.

샬럿 코르데이가 품은 대의와는 달리, 현실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장 폴 마라에 대한 ‘신성화’ 작업이 시작되면서다. 혁명 정부는 ‘국장’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국민제헌의회에서는 추도사가 낭독된다. “마라는 예수처럼 오직 민중만을 사랑했습니다. 왕, 귀족, 사제, 사기꾼을 미워했으며, 예수처럼 그는 민중의 재앙에 맞서 싸우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낭독자는 변태 성욕으로 이름을 남긴 ‘사드 후작’이다.

겉으로는 추모였으나, 속으로는 정치적 목적이 가득했다. 극단파는 시민들의 고양된 감정을 정치적 에너지로 전환시켰다.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권력은 최절정에 달했다. 로베스피에르를 절대 권력으로 치켜세운 국민제헌의회는 선언한다. “공포가 오늘의 질서입니다.” 반혁명 의심자는 오직 혐의만으로 구금됐다. 수십만명이 체포되고, 1만7000여명이 처형됐다.

공포는 통제의 원리이지, 통치의 원칙일 수 없다. 로베스피에르를 위시한 극단파들을 향한 반동이 일어났다. 로베스피에르도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그는 자신의 통치 원리에 죽임을 당한 셈이었다. 혁명의 키는 온건파의 손에 넘어갔다. 지지부진한 혁명, 엉망인 경제, 계속되는 비루한 삶. 그 불안을 먹고 정권을 잡은 이가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극단의 끝, 그리고 다시 극단의 시작. 비극의 영원 회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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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9호 (2025.05.14~2025.05.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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