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븐스는 젊은 시절부터 영국 대저택 '달링턴 홀'의 집사였다. 스티븐스는 직업적 사명감으로 부친 임종조차 외면한 채 주인 달링턴 경과 그의 친구들 시중을 든다.
달링턴 홀에서 보냈던 평생의 나날들을, 스티븐스는 인생 최고의 시간으로 여긴다. 달링턴 경은 해박한 외교 지식과 그에 걸맞은 인맥, 기품 있는 언행에 사려 깊은 성품까지 두루 갖춘, 완벽에 가까운 신사였다. 그런 달링턴 집안에서 근면하게 종사했으니 스티븐스에겐 영예로운 추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스의 충심 이면에서 역사는 달링턴 경을 "반역자"라며 깔아뭉갰다.
영국인 달링턴은 사실 '나치 부역자'였다. 달링턴은 용서와 화친을 주장하면서 '독일의 무장'을 유럽 외교가에 호소했다. 자신의 대저택을 나치 장교를 위한 비공식 외교 회담장으로 쓰기도 했다. 훗날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달링턴의 주장은 아마추어의 빗나간 망상으로 판명 났지만, 스티븐스에게 달링턴 경은 그저 최고의 신사이기만 했다.
옛 소설을 뜬금없이 회고한 것은 최근 이 소설을 재독하며 느낀 어떤 스산한 감정 때문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스티븐스의 1인칭 회고로 전개된다. 이 책을 펼친 독자는 스티븐스의 강한 확신이 얼마나 잘못된 신념과 선택적 망각으로 짜깁기됐는지를 몇 장 넘기지 않고도 알게 된다.
스티븐스의 두뇌는 '편집된 기억'으로 얼룩져 있다. 독자는 스티븐스의 독백을 불신하게 되고, 이를 통해 스티븐스와 달링턴 경의 서사를 재구성해 해석하게 된다. 문학비평에선 스티븐스처럼 독자에게 거짓을 발설하는 화자를 앞세우는 기법을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고 부르는데, '남아 있는 나날'의 스티븐스는 20세기 소설 가운데 이 분야의 최고 경지다.
그런데 신뢰할 수 없는 화자란 주제가, 갈수록 외딴섬이 돼가는, 멀고 먼 문학만의 이야기일까?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우리 주변에서 자주 목격된다. 사실을 곡해해 지지자의 표를 끌어모으는 정치인이 대표적이다. 팩트의 왜곡은 좌우가 부지런하고 한결같아서 극우도 극좌도 진실을 편집해낸다.
설득에만 성공하면 진실의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했던 근래의 역사 때문이다.
더 많은 '좋아요'를 획득한 자의 언어는 진실이 된다.
그뿐인가? 인공지능, 알고리즘, SNS, 인플루언서, 딥페이크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대표 사례다. 인공지능은 프롬프트에 몇 줄만 기입하면 거짓마저 정리해주고, 알고리즘은 두 개의 충돌하는 사실 중 한쪽만을 파노라마처럼 나열한다. 동굴 밖 두 개의 태양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고를지 선택만 하면 된다.
현대는 불신의 화자들로 포위됐다. 상대적 진실은 절대적 진실로부터 완승을 거뒀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해진 걸까?
어느덧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란 성찰적 질문을 '누구를 믿을 것인가'란 목적적인 질문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정보의 진실성 대신에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말한 자의 이미지를 신뢰한다.
이시구로는 올해 초 영국 가디언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증거가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진실을 스스로 주장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무엇이 진실일 수 있는지에 대한 정의(定義)가 모호해졌다…."
자세를 바로잡고,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대선이 벌써 한 달여 남았다는 점에선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의 언어가 진실인가? 왜, 어떻게 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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