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이면서 동시에 문제적 인물이었다. 타고난 문재(文才)로서, 유려한 글로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훔쳤다. 그의 잠자리 리스트에는 숱한 유부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서 침실로 자연스레 들어갔다. 잠자리 대상에는 이미 결혼한 그의 이복 여동생도 포함됐다.
셀 수 없는 섹스 스캔들에 결국 그는 추방당했다. 찬사의 손짓은 경멸의 손가락질로 변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폐인이 될 법한데, 그가 서 있던 곳은 의외로 전쟁터였다. 타국 독립을 위해 총을 든 것.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전쟁에 나서자 기어이 자신의 몸을 던졌다. 며칠 후 그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영국 낭만주의 시인을 대표하는 조지 고든 바이런 경의 이야기다.
바이런의 죽음은 본의 아니게 영국에 엄청난 ‘투자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런던 시민이 그를 추모하는 방법이었다. 무엇이 그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었을까.

‘섹스 스캔들’로 추방당한 바이런
귀부인과 성추문…이복 여동생과도 잠자리
바이런은 거친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4살 때 매춘을 일삼다 외국에서 객사했다. 어머니는 다리에 장애가 있는 바이런에게 걸걸한 입으로 욕을 내뱉었다. 고향 땅은 그에게 꽃이 피지 않는 불모의 땅이었다.
바이런은 언제나 다른 곳에서 이상향을 찾아 헤맸다. 바로 그리스였다. 신들이 고대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곳. 태초의 미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곳. 그가 21살이 됐을 무렵 그리스로 여행을 떠난 배경이다. 폐허가 된 고대 그리스 신전 앞에서 그가 느낀 전율은 여전히 생생히 전해온다.
“아름다운 그리스여, 사라진 유적의 슬픈 가치여.”
바이런은 그리스 여행의 기억을 책으로 써 냈다.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였다. 세상을 유랑하면서 몽상에 젖어들고 쾌락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내의 여정. 선의 결정체 같은 기존 영웅들과는 궤를 달리한 덕분인지, 책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바이런은 런던 사교계의 스타가 됐다.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여성에게 바이런은 언제나 마음을, 그리고 몸도 함께 열었다. 바이런을 안 거친 귀부인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캐롤라인 램이라는 여성은 바이런이 자신을 안 만나준다는 이유로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배다른 여동생 오거스타 리(유부녀)와도 섹스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결국 그는 런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사망한 바이런
런던 시민 ‘그리스 독립 채권’ 투자 열풍
조국을 떠난 그가 찾은 곳은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그리스였다.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제국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가 이슬람 세력에서 벗어나 부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이런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유럽의 슈퍼스타인 그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한 배경이다. 잉글랜드에 있는 재산 2만파운드를 처분해서 군대를 직접 소집하기도 했다. 정작 그는 총 한번 쏴보지 못하고 열병에 걸려 죽어버리고 말았지만.
별은 거대할수록, 강력한 중력의 블랙홀을 남긴다. 바이런이라는 별의 죽음은 유럽의 모든 관심을 그리스로 향하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가 타국에서 산화한 서사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나, 불멸하는 그리스여(Immortal, though no more!)’ 바이런의 글귀를 되새겼다. 서구 문명 요람이었던 그리스, 고대의 지혜를 간직한 그리스, 이슬람에 억압받는 그리스를 구원해야 한다는 열망이 폭발했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찬미를 의미하는 ‘필헬레니즘’은 바이런을 기점으로 더욱 크게 성장했다.
바이런에 대한 추모는 단지 광장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런던 시민이 몰려간 곳은 바로 런던증권거래소. ‘그리스 독립 채권’을 사기 위해서였다. 바이런을 추모하는 런던 시민의 방식이었다. 1824년 80만파운드 채권이 흥행에 성공하자 이듬해에는 200만파운드 규모가 발행된다. 그야말로 흥행 대박. 그리스 독립을 위해 돈이 쓰인다는 낭만적인 이유와 수익률이 10%에 육박한다는 투자 욕망이 결합된 덕분이었다.
런던증권거래소에서 그리스가 유력 투자처로 떠오른 데는 시대적 배경도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런던으로 잠깐의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1803년 나폴레옹이 영국과 전쟁을 선언하면서 영국 정부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다. 그들은 국채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돈을 조달했다. 연 3% 이자를 지급하는, ‘콘솔’이라고 불리는 영국 국채의 등장이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채권 가격이 액면가 30%로 폭락하기도 했다. 국채는 언제나 조국과 운명을 함께하니 영국이 프랑스에 무릎을 꿇으면 국채 이자를 지급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채권 가격이 회복한다. 저가 매수를 한 투자자들이 큰돈을 벌 수 있었던 배경이다.

패색 짙어진 그리스…채권값도 폭락
낙담한 투자자…결국 영·프·러도 참전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같았다. 돈의 맛을 본 투자자들은 더 큰 수익을 찾아 나선다. 영국 국채의 낮은 이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그때 등장한 빛나는 투자처가 바로 ‘그리스 독립 채권’이었다. 특히 영국의 자유주의자와 정치인이 만든 ‘런던 필헬레닉위원회’가 앞장서 채권 투자를 독려했다. 그리스 독립군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서였다. 당대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의 민간 자본이 대규모로 신생 독립국가로 흐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계 최초의 국제적 공공채권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숭고한 이상은 언제나 현실의 때로 오염되기 마련이다. 애써 조달한 금액이 브로커 수수료를 떼고 절반밖에 그리스로 향하지 않았다. 공채로 조달한 금액이 영국 내에서 바로 무기 구입으로 사용되곤 했는데, 선박이 침몰해 도착하지 않는 사례도 많았다. 더구나 그리스 독립군은 그 돈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당나라 군대’였다. 이권 다툼으로 분열하기도 했다. 채권으로 조달한 금액은 오늘날 기준으로 수천억원에 달했지만, 그들의 군복은 여전히 낡았고 무기는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리스 독립군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상 유지뿐. 오스만제국군이 결국 아테네를 점령하면서 승기를 잡았고 ‘그리스 독립 채권’도 위기를 맞았다.
유럽의 필헬레니즘 열기는 더욱 불타올랐다. 유럽의 모태인 도시가 다시 이슬람 손에 넘어간다는 생각이 조바심을 불렀다. 어쩌면 채권값 폭락에 대한 분노도 열정의 땔감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정치는 언제나 대중의 열망을 좇는다. 영국·프랑스·러시아가 그리스 독립전쟁 개입을 선언했다. 오스만제국은 결국 그리스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스는 독립국으로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런던이 국채 투자를 이유로 그리스 재정에 개입하면서다. 그리스를 살린 동아줄이, 이제는 그들의 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난봉꾼이자 위대한 문인이 남긴 세계사의 흔적이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7호 (2025.04.30~2025.05.0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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