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임직원들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존 펠런 미국 해군성 장관이 울산조선소를 찾아 한미 조선업 협력의 핵심인 선박 건조 역량을 확인한다는 소식 덕분이다.
미국 해군성은 미 국방부 산하 조직으로 해군의 행정, 예산, 장비 획득 업무를 맡는다. 미 해군은 향후 30년간 364척 구매에 1조750억달러, 우리 돈으로 무려 약 160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군함 건조를 동맹국에 맡길 수 있도록 관련법도 60년 만에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 덕분에 세계 1위 조선 업체인 HD현대중공업이 사실상 ‘최적의 파트너’로 낙점받은 분위기다.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특수선(군함) 야드를 중점적으로 둘러본 펠런 장관은 “우수한 역량을 갖춘 조선소와 미 해군이 협력한다면 미 함정도 최고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은 펠런 장관에게 “한국과 미국은 혈맹으로 맺어진 친구이자 최고 동맹국”이라며 “HD현대가 가진 기술력과 선박 건조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 조선업 재건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관세 폭탄, 글로벌 경기 침체 여파로 재계 전반이 움츠러들었지만 HD현대는 예외다. 조선업 부활과 전력기기 산업 호황을 필두로 실적이 날개를 달면서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는 모습이다. 최근 들어서는 조선업 부활을 선언한 트럼프 행정부와의 조선업 협력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더 큰 기대에 부풀었다.

HD현대 영업이익 날개
지주사 체제 전환 후 최대 영업이익
HD현대의 올 1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1조286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2.1% 증가했다. 2017년 지주사 체제 전환 이후 분기 기준 최대다. 매출도 17조86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5% 늘었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HD현대 전체 매출은 2020년 33조8044억원에서 지난해 68조8480억원으로 두 배가량 뛰었다. 2020년까지만 해도 1조1187억원 당기순손실을 냈지만 지난해 2조1077억원 순이익을 올리면서 수익성도 확연히 좋아졌다.
호황의 주역은 역시 조선업이다. HD현대 조선·해양 부문 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올 1분기 매출 6조7717억원, 영업이익 8952억원으로 영업이익률만 12.7%를 기록했다. HD한국조선해양은 올 들어 49척, 61억6000만달러를 수주하면서 연간 수주 목표치(180억5000만달러) 달성을 위해 순항 중이다.
한동안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불리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수주가 날개를 달았지만 최근에는 중국 조선소들이 강세를 보여온 컨테이너선 수주까지 휩쓰는 점이 고무적이다.
HD현대미포는 올해 전 세계에서 발주된 총 33척의 ‘피더 컨테이너선(3000TEU 미만급 컨테이너선)’ 중 절반에 달하는 16척을 수주해 글로벌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린다. 피더 컨테이너선 시장은 그동안 중국 조선사들이 우위를 보여왔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조선업 견제가 강화되면서 글로벌 선사들이 중국 대신 한국 조선사에 컨테이너선 일감을 잇달아 맡기는 양상이다. 조선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컨테이너선 시장을 휩쓸면서 글로벌 조선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지만, 한국이 LNG 운반선뿐 아니라 컨테이너선 수주를 점차 늘리면 중국과의 점유율 격차를 좁힐 가능성도 높다”고 귀띔했다.
호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업 부활을 위해 조선 강국인 한국에 SOS를 보내는 점도 호재다.
미국 상원과 하원의 민주, 공화 의원들은 최근 ‘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위한 조선업과 항만시설법(SHIPS for America Act)’을 공동으로 발의했다. 이 법안은 세제 혜택과 펀드 설립 등을 통해 조선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내용이 담겼다. 특히 외국에서 건조된 선박도 미국 건조 선박으로 간주하는 단서 조항이 달려 미국이 협력을 희망하는 한국 조선 업계에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배기연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내년부터 2030년까지 HD현대중공업의 미국 함정 건조 수주 규모는 22억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2028년 특수선 부문 영업이익은 7098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617%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전력기기 사업을 해온 HD현대일렉트릭도 조선업 호황의 뒤를 떠받친다.
HD현대일렉트릭의 1분기 영업이익은 218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9.4% 증가했다. 1분기 매출도 같은 기간 26.7% 늘어난 1조147억원을 기록했다. HD현대일렉트릭의 분기 매출이 1조원을 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HD현대일렉트릭 실적이 날개를 단 것은 변압기를 비롯한 전력기기 시장이 세계적으로 ‘슈퍼사이클’에 진입한 덕분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으로 데이터센터에 필수인 초고압 변압기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다. HD현대일렉트릭의 올 1분기 수주만 13억3500만달러로 총 수주 잔액은 61억5500만달러, 우리 돈으로 8조7500억원에 달한다.
HD현대일렉트릭은 초고압 변압기뿐 아니라 초대형, 특수변압기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말 캐나다 에너지 기업의 방폭형 변압기(Dynamic Pressure Resistant System·DPRS) 수주를 따낸 데 이어 올 3월에도 미국 남동부 에너지 기업의 DPRS 수주에 성공했다. 올해 HD현대일렉트릭의 DPRS 공급량은 지난해 대비 약 7배에 달할 전망이다.
DPRS는 특수변압기의 일종이다. 내부에서 결함이 발생해도 즉각 압력 상승을 견디며 탱크 손상이나 오일 누출 없이 압력을 안전하게 배출한다. 이 덕분에 화재와 폭발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DPRS는 그동안 스위스 ABB, 독일 지멘스 등 일부 기업만 생산해왔는데 그만큼 HD현대일렉트릭의 기술력을 인정받았다는 평가다.

정유·건설기계는 부진
국제유가 하락에 오일뱅크 이익 급감
다만 모든 사업이 잘나가는 것은 아니다. 정유, 건설기계 사업은 부진을 피하지 못했다.
HD현대오일뱅크의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89.8% 감소한 311억원에 그쳤다. HD현대오일뱅크 실적이 부진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 강화 기조로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국제유가가 급락한 영향이 크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두바이유는 지난 1월 17일 배럴당 84.61달러에서 4월 28일 66.85달러로 급락했다. 실적 전망이 어둡다 보니 그룹 숙원 과제인 HD현대오일뱅크 기업공개(IPO)도 쉽지 않은 양상이다. HD현대오일뱅크는 2012년, 2019년, 2022년 세 차례나 IPO에 도전했지만 경영 환경 불확실성을 이유로 결국 IPO를 철회했다.
건설기계 사업도 불안한 모습이다. 건설기계 부문 지주사인 HD현대사이트솔루션의 1분기 영업이익은 120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6.3% 줄었다. 핵심 계열사 HD현대인프라코어 영업이익은 북미, 유럽 등 글로벌 수요 부진으로 같은 기간 27% 감소한 678억원 수준에 그쳤다. 이상현 BN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 관세 등 대외 환경 불확실성 여파로 건설기계, 엔진사업부 수요 부진이 지속되는 양상”이라며 HD현대인프라코어 목표주가를 1만원에서 8500원으로 낮췄다.
“HD현대가 조선, 전력기기 사업 호황 덕분에 모처럼 실적 상승세를 이어가지만 마냥 안심할 때는 아닌 듯싶다. 정유 업황 악화로 HD현대오일뱅크 실적 회복이 녹록지 않은 데다 두산그룹으로부터 야심 차게 인수한 HD현대인프라코어 실적이 부진해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고심이 커질 듯하다.” 재계 고위 관계자 귀띔이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9호 (2025.05.14~2025.05.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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