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5 19:13:25
SK하이닉스 협력사 전직 직원이 인공지능(AI) 반도체 핵심기술인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 기술을 중국으로 빼내려다 인천공항에서 서울경찰청 산업기술안보수사대에 긴급 체포됐다. 그는 올해 초 퇴사하면서 외부로 빼돌릴 목적으로 HBM 패키징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드러났다.
25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한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기소 건수는 2021년 14건, 2022년 14건, 2023년 19건, 2024년 26건으로 지속 증가하고 있다.
정부는 산업기술보호법에 근거해 지난해 총 76개 국가핵심기술을 지정했다. 반도체 분야가 가장 많아 11개 기술이 지정됐다. 이어 자동차·철도(10개), 철강(9개), 조선·기계(각 8개), 정보통신(7개) 순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 첨단산업기술 유출이 이어지고 중국 기술 수준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더 이상 중국이 탐낼 한국 기술이 없는 사태’가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기술 유출 범죄의 핵심 타깃인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의 추격이 위협적이다.
욜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지난해 D램 시장에서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점유율은 5%까지 올라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을 위협하고 있다. CXMT는 우한신신(XMC), 퉁푸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과 함께 HBM2 개발을 마치고, 곧 대량 생산해 내년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기술전쟁이 격화하면서 기술 유출 범죄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해외 현지 법인으로 핵심 인력을 스카우트하는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자문회사나 특허관리전문기업(NPE)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한층 더 교묘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법인 설립은 치밀해진 기술 유출범들의 수법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한국 지사를 세우면 제재를 피할 수 있고 외국 생활을 꺼리는 전문가들을 쉽게 영입할 수 있어 범죄에 유리하다는 게 검찰 설명이다. 해외에 법인을 세워 수사망을 피하거나 증거를 인멸하는 사례도 잇따랐다. 수원지검은 지난 1월 반도체 세정장비 기술 유출 사건을 수사해 2명을 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중국 반도체 업체와 기술이전 계약을 맺고 국내 기업의 전문인력을 중국 업체가 국내에 세운 법인으로 이직시키는 방식으로 기술을 빼돌리려 했다.
수사를 피하려고 해당 기술 분야와 전혀 상관없는 위장회사에 고용하거나 위장신분을 동원하는 지능적 수법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이 작년 4월 3명을 구속 기소하고 3명을 불구속 기소한 반도체 증착장비 기술 유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중국 내 위장회사와 고용계약을 체결하고 영문 가명을 사용해 수사망을 피하려 했다.
자문중개업체나 NPE를 통한 신종 수법도 눈에 띈다. 서울중앙지검은 2023년 8월 자문중개업체에서 막대한 자문료를 받고 2차전지 제조·공정 기술을 촬영해 빼돌린 전직 임원 등을 수사해 1명을 구속 기소하고 1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전직 임원이 미국에 NPE를 설립한 뒤 불법 취득한 기밀정보로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하고 1000억원대 합의금을 요구한 사건도 있었다.
검찰은 날로 고도화·지능화하는 범행에 맞서 디지털 포렌식, 소스코드 분석, 정보파일 정밀 분석 등 과학적 기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피고인이 함수와 파일 이름, 폴더 구조 등을 일부 바꿔 새롭게 개발한 소스코드라고 주장한 사건에서 검찰은 대용량 소스코드를 자동으로 비교할 수 있는 유사도 분석 프로그램을 자체 개발해 유죄를 입증했다. 포렌식 기법으로 설계도에 남아 있던 ‘디지털 지문’을 확인해 반도체 기술 도용 사실을 밝혀낸 사례도 있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와 정보를 공유하고, 특허청 기술디자인특별사법경찰과 수사 초기부터 협력한다. 관세청도 전략물자 밀수출 적발을 위해 협조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 시스템의 한계도 뚜렷하다. 기업은 부정적 이미지를 우려해 고소·고발을 꺼리는 사례가 많고, 수사 경험이 부족한 유관기관은 조사 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놓치기 쉽다. 범죄 구성요건 입증에 전문지식이 요구돼 수사 난도가 상당하고 무죄율도 높은 편이다. 수사·공판이 장기화되면 피해 기업의 손해가 커져 신속한 대응이 필수지만, 전문인력 부족으로 기술분석과 자문, 경찰 보완수사 등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도 있다. 피해액 산정이 어렵다는 점 또한 엄벌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대검 관계자는 “유관기관, 경찰, 해경 등 수사기관과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업이 합동으로 첩보 수집, 증거 확보, 기술 분석·자문, 수사·기소까지 원트랙(One-track)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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