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현 디지털플랫폼정부위 인공지능플랫폼혁신국장 챗GPT 아무리 뛰어나도 한국만의 조선 용접공정 속속들이 알 수 없어 LLM·버티컬AI 함께 가야
게티이미지뱅크
"챗GPT가 이렇게 잘돼 있는데, 굳이 한국형 인공지능(AI)이 필요해요?"
소버린 AI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자주 받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특히 의아한 것은 프랑스, 일본, 아랍에미리트(UAE), 독일, 사우디 등 주요국들이 앞다퉈 소버린 AI를 국가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비판적 시각이 팽배하다는 점이다. 브릭스(BRICS) 국가들 또한 AI 국가 주권을 원칙으로 제시하는 공동성명을 7월 7일 발표했다. 이들이 모두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간단히 생각해보자. 만약 내일 당신의 병원 진료 기록이, 자녀의 학습 데이터가 모두 해외 AI 플랫폼에서 처리된다면? 그 AI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어떤 데이터로 학습했는지, 누가 통제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면? 통상 분쟁으로 하루아침에 서비스가 중단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AI는 이제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국가의 신경망이자 사회의 운영체제이며 국가 전략자산 그 자체다.
소버린 AI에 대한 오해를 먼저 풀어야겠다. 첫째, 소버린 AI를 '또 하나의 K프로젝트'로 보는 시각이다. 소버린 AI는 '한국어 특화 AI'나 '국산 기술 육성'이라는 낡은 산업정책의 연장선이 아니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주권을 재정의하는 문제다. 전통적 주권이 영토와 국민에 대한 배타적 통치권이었다면 디지털 주권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대한 통제력과 책임성을 의미한다. 둘째, 기술 격차를 따라잡는 것이 절대적 목표라는 생각이다. 소버린 AI의 목표는 챗GPT나 클로드(Claude)와 단순히 성능만 경쟁하는 게 아니다. MCP나 A2A 같은 표준 프로토콜의 등장으로 이제는 생태계 연계를 통한 경쟁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자체 모델을 가지고 활용하는 것과 없이 활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게임이다. 셋째, 소버린 AI가 폐쇄적 고립주의라는 편견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소버린 AI는 보호주의적 장벽이 아니라 안전한 연결의 기반이다. 핵심 데이터와 기능은 우리가 통제하되 필요시 외부 AI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유연한 구조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버린 AI는 어떤 특성을 가져야 할까? 첫째, 설명 가능성과 투명성이다. 의료 AI가 특정 진단을 내렸을 때, 금융 AI가 대출을 거절했을 때 "알고리즘이 그렇게 결정했습니다"라는 답변으로 충분하지 않다. 둘째, 연결된 자율성이다. 고립된 기술은 죽은 기술이다. 소버린 AI는 자국 중심의 폐쇄적 시스템이 아니라 글로벌 기술 질서 속에서 유연하게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전략적 통제 가능성이다. AI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학습하고 진화하며, 스스로 의사결정의 영역을 넓혀가는 '지능적 시스템'이다. 이러한 AI의 진화 방향과 속도를 우리가 직접 통제할 수 없다면 그 기술은 결코 우리 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넷째, 신뢰성과 책임성이다. AI가 내린 결정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기술적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반을 구성하는 핵심 원칙이다. 다섯째, 공급망 보안이다. AI는 반도체, 서버, 클라우드 인프라, 네트워크, 운영체제, 프레임워크, 데이터, 모델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으로 얽힌 생태계의 결과물이다. 특정 부문에서 과도한 의존이 발생하지 않도록 리스크를 분산하고, 필요시 대체 수단을 확보하는 유연한 체계가 중요하다.
올바른 소버린 AI를 구현하려면 세 가지 전략이 병행돼야 한다. 먼저 우수한 자체 대형언어모델(LLM)의 확보는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규모의 경쟁'이 아니라 신뢰와 책임성을 중심으로 한 '신뢰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 둘째, 버티컬AI 생태계 구축이다. 자체 LLM이 플랫폼이라면 버티컬AI는 그 위에서 작동하는 특화된 전문 솔루션이다. 챗GPT가 아무리 뛰어나도 한국의 건강보험 급여 기준, 조선업의 용접 공정, 반도체 공정의 미세한 노하우를 우리만큼 잘 알 수는 없다. 산업별로 축적된 도메인 지식과 규제 환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버티컬AI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경쟁력이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협력 전략이다. 대외경제협력기금(EDCF)과 공적개발원조(ODA)를 활용해 현지의 데이터와 규범, 문화적 맥락을 존중하는 '맞춤형 AI 동반 개발' 전략으로 새로운 국제 협력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전 세계가 소버린 AI를 추구하는 이 시점에 유독 우리만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은 위험한 자기 부정이다. 소버린 AI는 기술 민족주의가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책임 있는 거버넌스를 위한 필수 인프라다. 디지털 주권의 시대, 우리는 단순한 AI 소비자가 아닌 AI 생태계의 능동적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소버린 AI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