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6.11 00:57:52
모로코 북부로 떠난 여정 국제적인 항구도시, 탕헤르(Tangier) 로컬이 살아있는 역사지구, 테투안(Tetuan) 도시 전체가 블루시티, 셰프샤우엔
북아프리카의 땅 모로코 여행은 북부에서 출발했다. 여러 고대 도시의 면면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된 여정. 유럽과 인접한 고대 다문화 항구 도시 ‘탕헤르’를 기점으로 모로코에서 가장 완벽한 역사지구로 통용되는 ‘테투안’을 거쳐 푸르른 파라다이스의 평화로움이 자리한 ‘셰프샤우엔’으로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 전원을 켜자 메시지가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진다. 이곳은 오전 9시경, 이른 시간이지만 한국은 벌써 퇴근시간이 임박한 오후 5시경이다. 한국시간 기준 아침부터 오후까지 쌓인 메시지가 알람 소리 마냥 잠들어 있던 정신을 화들짝 깨운다. 낮과 밤이 뒤바뀐 8시간의 시차, 숫자가 가리키는 의미 그대로 머나먼 북아프리카의 땅, ‘모로코 왕국’에 여장을 풀고 일단 시차 적응을 끝냈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대륙에 속한 나라지만 일반적으로 고정관념에 박혀 있는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의 현상과는 약간 거리가 멀다. 지리상 서유럽 및 남유럽과 인접한 데다 기후 또한 이베리아 반도와 비슷한 양상을 띠기 때문에 ‘이곳이 아프리카가 맞나’ 싶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게다가 자원의 매장량도 풍부해 탄탄한 경제력을 자랑하는데, 광물 자원과 천연가스는 물론 농업과 어업의 비중도 상당하다.
이러한 천혜의 환경은 관광산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눈부신 다양성을 지닌 나라로 대표되는 모로코는 고대 도시와 장엄한 산맥, 광활한 사막이 전 세계 여행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요소다. 모로코 여정의 첫 번째 이야기, 같은 듯 다른 매력의 고대 도시를 살피기 위해 북부로 향했다.
유럽과 인접한 고대 다문화 항구 도시, 탕헤르
유럽 관광객이 많아도 너무 많다.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오늘이 부활절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무릎을 쳤다. 하필 탕헤르(Tangier)에 도착한 날이 부활절 연휴였다니. 숙소 잡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도 그제서야 납득이 갔다. 탕헤르는 모로코 북부, 지브롤터 해협 인근에 위치한 도시다. 스페인 남부 도시 타리파(Tarifa)에서 배를 타면 탕헤르까지 1~2시간가량 걸린다. 거리상 가깝다는 이점 때문인지 탕헤르 구도심을 장악한 유럽 관광객의 8할은 스페인 사람들이 다수다. 어디를 가든지 현지언어보다 스페인어가 더 크고 강렬하게 귓가를 때린다. 게다가 많은 모로코 사람들이 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때문에 외형만 모로코일 뿐,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어쩌면 정확한 표현이지 않을까.
탕헤르는 과거부터 지리적 이점을 제대로 활용한 도시로 인식되어 왔다. 북아프리카와 유럽을 이어주는 국제적인 도시로 불렸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페인에 점령되었다가 1956년 모로코가 독립한 뒤 현재까지 모로코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항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탕헤르 여행의 중심은 메디나(Medina)다. 메디나는 아랍어에서 유래된 ‘도시’ 또는 ‘마을’을 뜻하는 말로, 북아프리카 여러 도시의 오래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역사 도시를 가리킨다. 모로코를 포함해 북아프리카에서 유럽 세력의 침입 이전, 즉 유럽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기 전 각 국가를 구성하는 주요 도시를 메디나로 일컬었다.
각각의 메디나는 고대 도시 중심지로서 수세기 동안 문화, 상업, 정치적 권력의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고대 도시를 엿보는 관광의 핵심요소로 기능한다. 탕헤르를 비롯해 북부 여러 도시에는 각 도시가 가진 고유의 색채를 띠는 메디나, 즉 역사 지구가 자리해 있다. 특징이라면 좁은 거리와 건물이 서로 가까이 붙어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탕헤르 메디나는 15세기 포르투갈 요새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당시 수년에 걸쳐서 포르투갈은 물론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비잔틴, 영국, 스페인 문명의 본거지로서 다문화 도시로 각광받았다. 이곳 메디나에서 인기 있는 장소는 ‘그랑 소코(Grand Socco)’와 ‘쁘띠 소코(Petit Socco)’라 불리는 시장이다. 그랑 소코는 과거 도시의 주요 금 거래 시장이 있던 곳이었다. 현재에도 골동품이나 농산물을 판매하는 노점 가운데 보석상 몇 곳이 자리해 있어 과거의 명성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한다.
쁘띠 소코는 예술과 공예품 시장에 가깝다. 모로코 전통 스타일의 다채로운 소품이 즐비한 여러 상점들 사이에 노천 카페가 마련되어 있는데, 바로 쁘띠 소코에서 즐겨야 하는 것이 쇼핑과 더불어 노천 카페에서 커피를 맛보는 일이다. 진한 커피 향이 코를 먼저 자극하고 신선하고 풍성한 맛에 또 한번 놀란다. 특히 에스프레소에 우유가 첨가된 라떼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이곳 커피가 더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대다수의 카페에서 라떼를 주문하면 에스프레소가 담긴 컵과 우유가 따로 서빙되고, 웨이터는 손님이 보는 앞에서 에스프레소가 담긴 컵에 데워진 우유를 기다란 곡선을 그리며 따라 붓는다.
이 퍼포먼스 자체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곡선의 형태에 따라 둘의 조화가 달라져 커피 맛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 웨이터의 설명이다. 처음엔 약간 허황된 말 같았으나, 커피를 맛본 뒤 웨이터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투박한 듯 조화로운 맛, 딱 그랬다. 한데 중요한 건 가격. 이 정성이 들어간 라떼 한 잔이 단돈 1,000~2,000원이다. 쁘띠 소코 중심에 자리한 그란 카페 센트랄(Gran Café Central)과 그 주변 골목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장사하는 카페 어디든 기본 이상의 맛은 보장한다.
가장 완벽한 메디나가 위치한 도시, 테투안
모로코 북부에서 탕헤르에 이어 주요 국제 항구로 꼽히는 곳이 테투안(Tetuan)이다. 탕헤르에서 남동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는 이곳은 탕헤르에 가려져 관광지로서는 다소 입지가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로코 현지인들은 로컬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역사지구로 테투안의 메디나를 추천한다. 탕헤르와 테투안을 오가는 시외버스가 하루에 서너 차례 운행하는 데다 거리상 1시간 30분가량으로 소요시간도 길지 않아 당일치기로 방문했다. 도심에 위치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메디나까지는 걸어서 이동이 가능할 만큼 제법 작은 도시가 자아내는 낯설지 않은 친숙한 풍경이 테투안의 첫인상을 완성했다.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 잡은 이곳의 메디나는 약 5km 길이의 역사적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총 7개의 문을 통해 출입이 가능하며, 도심의 주요 도로가 각기 성문과 서로 연결되어 광장을 형성하는 열린 공간의 건축적 설계가 돋보이는 구조다.
특히 테투안은 8세기경 이슬람 시대에 모로코와 스페인 안달루시아를 잇는 주요 교통로 역할을 한 핵심 도시였다. 당시 스페인에 의해 쫓겨난 안달루시아 난민들이 이 도시를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이로 인해 모로코와 스페인의 예술과 건축이 이곳 메디나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쳤다.
규모 면에서는 모로코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메디나 중 하나에 속하지만 역사 및 예술적 가치는 크다. 이는 이곳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으로도 입증된다. 주변 성벽, 성문, 요새화된 건축물 등 초기 설계가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 고대 도시 구조가 살아있다는 점에서 이곳 메디나의 보편적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호객꾼
테투안 메디나는 확실히 탕헤르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다가왔다. 일단 비좁은 골목길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사실 탕헤르 메디나가 가장 비좁다고 느꼈지만 테투안 메디나는 그 경험을 하루만에 갈아치웠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미로 같은 길. 무엇보다 지도가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걷다가 막다른 골목길을 마주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길을 잃어 약간 멈칫하는 순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현지인 남성이 곧바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들의 돈벌이 수단이다.
처음에는 상냥함을 과시하며 무조건적인 친절을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원하는 목적지까지 안내가 끝나고 나면 자신의 친절에 대한 값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좋게 포장하면 나름 가이드로 먹고 사는 셈인데, 처음부터 친절함 그 이면에 숨겨진 야망을 밝혔더라면 씁쓸함이 덜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요구한 돈은 푼돈에 불과하다지만 돈을 떠나 불쾌한 경험이 이토록 완벽한 역사지구에 흠집을 남긴 것만 같았다.
이윽고 테투안 메디나에서 가장 방문하고 싶었던 곳, 무두질 공장에 닿았다. 15세기부터 테투안은 전통적으로 모로코에서 대표적인 가죽 생산 도시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다. 메디나에서 판매되는 항목 또한 가죽 관련 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메디나 전체에 가죽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곳 메디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무두질 공장은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규모는 매우 작은 편에 속하지만 관광객 방문을 허용하는 데다 가죽 가공 과정을 살피기에는 완벽한 장소다.
염소 가죽을 재단하고 이를 여러 식물과 결합하여 색을 입히는 등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천연 염료와 기법이 담긴 정교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장인정신에 입각한 공장 사람들의 열악한 업무 환경, 천연가죽이 가진 고급스러움과는 정반대되는 공장 모습은 다른 차원의 경험을 안겼다.
파라다이스를 염원하는 블루 도시, 셰프샤우엔
‘타진’은 모로코의 대표 전통음식이다. 넓게 보면 북아프리카의 전통음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각 나라마다 재료나 조리법에 따른 차이를 보이는데, 모로코의 타진 요리는 토기 냄비 안에 얇게 썬 고기나 생선, 채소를 곁들여 천천히 조리한 스튜가 일반적이다. 모로코에서는 토기 냄비를 일종의 진흙으로 만든 ‘휴대용 오븐’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냄비에 딸려 있는 돔형 또는 원뿔형 뚜껑은 예로부터 물이 귀한 북아프리카에서 최소한의 물을 이용해 스튜를 조리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발된 것이다. 뚜껑이 증기를 가둬 각기 재료에서 수분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적은 양의 물로 조리가 가능하다.
토기 냄비에 담긴 타진 요리를 보면 뚝배기에 팔팔 끓여 나오는 우리나라의 찌개류를 떠올리게 한다. 첫 입부터 냄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찌개와 비슷한 점이다. 탕헤르에서 모로코 여행을 시작한 첫날부터 거의 매일 1일 1타진을 해치우고 있는데, 셰프샤우엔(Chefchaouen)에 도착해서 맛본 타진은 확실히 이곳이 관광지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탕헤르나 테투안 식당에서 맛본 것과 비교하면 양도 적고 가격도 비싸고 맛도 그다지 성에 차지 않는다. 물론 현지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식당에 갔다면 맛은 모르겠지만 양이나 가격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관광지 물가’가 존재하는 셰프샤우엔, ‘블루 시티’라는 별칭을 가진 이곳은 외국인 여행객은 물론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인기 관광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셰프샤우엔은 모로코 북서부 리프 산맥 서쪽, 해발 약 600m 카알라 산기슭에 위치한다. 대다수의 벽이 온통 푸른 색으로 칠해진 셰프샤우엔의 역사지구는 1471년 포르투갈 침략군의 잠재적 공격으로부터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작은 요새다.
셰프샤우엔이 블루 시티가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는데, 그중 모기를 쫓아내기 위해 벽을 파란색으로 칠했다는 설과 하늘과 천국을 상징하는 파란색에 의미를 부여해 마을 사람들이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한 목적에서 푸른 벽을 완성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한데 여행객의 입장에서 바라본 푸른 벽은 그야말로 관광객 유치를 위한 최고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메디나 전체가 마치 ‘인스타용’ 인증샷을 찍기에 완벽한 포토존처럼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셰프샤우엔 메디나에는 ‘리아드(Riad)’라 일컫는 모로코 전통 주택이 숙박시설로 널리 이용된다. 리아드는 대개 현지인 가족이 거주하며 운영하는 숙박시설로 모로코 전통 건축 양식은 물론 문화와 따뜻한 환대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리아드는 아랍어로 ‘정원’을 뜻하는데, 내부 정원이나 안뜰이 모로코 전통 주택의 특징이며 옥상 테라스가 마련되어 있어 마을 전망을 감상하기에도 제격이다. 안뜰과 정교한 장식, 독특한 건축양식이 갖춰진 리아드에서 머문 하룻밤은 셰프샤우엔 여행에서 최고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진흙 벽돌로 지어진 리아드 방 내부에서 특이한 점은 창문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방 또한 창문이 없는 구조는 동일했다. 이는 이슬람 사회의 사회적 관습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물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집은 남성보다 여성의 공간이라 인식된다.
바깥 활동을 활발히 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거의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 개인의 프라이버시, 특히 여성의 사적인 공간을 매우 중시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창문은 외부와의 연결을 의미하기 때문에 집 내부에 창문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리아드에 들어서는 순간 외부와의 단절이 시작된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마치 지하세계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은 오히려 꽤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모로코 여행은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83호(25.06.1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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