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4 13:37:41
올해 7년째 노랑풍선 ‘꿈 만들기’ 프로젝트 AIA생명·함께하는 사랑밭 파트너사로 참여 진태현·박시은 부부, 조용한 동행 함께해 자립준비청년 대상,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제도 밖 청년들, 여행을 통해 사회와 연결 비행기부터 여권까지, 모든 게 처음인 여행
“취약계층 청소년이 나이키 신발을 신었다고, ‘왜 그런 걸 신냐’며 시비 거는 사람들도 있어요. 왜 자립준비청년들이 싱가포르를 가냐고요? 가야죠. 왜 뉴욕은 안 되나요? 오히려 더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충분히 좁은 세계에서 살아왔어요.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봐야 할 친구들이에요.” 이명수 함께하는 사랑밭 ESG임팩트팀 팀장의 말이다.
자립준비청년이란 아동양육시설이나 위탁가정에서 자란 뒤, 만 18세 전후에 보호가 끝나고 홀로 살아가는 청년들이다. 자립정착금 몇천만 원, 월 50만 원의 자립수당. 제도는 있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 이후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곁에서 도와주는 어른도 거의 없다.
“사실 그 50만 원도 5년 한정이에요. 다양한 지원금이 있지만 그나마도 신청한 친구들만 받아요. 몰라서 못 받는 친구들도 많고요. 사회에 던져놓고, 선택은 전부 본인 몫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더더욱, 이런 기회가 필요해요. 관광이 아니라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 돼야 하니까요”라고 이 팀장은 전한다.
여행사 노랑풍선이 주관한 ‘꿈 만들기’ 프로젝트는 그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꿈 만들기는 여행업계에서 보기 드문 장기적 사회공헌활동이다. 2018년부터 매년 저소득 취약계층 아동과 청년에게 전액 지원 해외여행을 제공한다.
올해 7회째를 맞은 이 프로젝트에 AIA생명과 비영리법인 함께하는 사랑밭이 협력 파트너로 참여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자립준비청년을 대상으로 삼았고 3박 4일간 싱가포르를 다녀왔다.
비행기 바퀴가 땅을 떠나는 순간, 몇몇 청년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여권 발급부터 공항 출국장 통과까지, 모든 게 처음이었다.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하자 얼굴마다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비행기 착륙에 놀라고 입국심사에 줄에 긴장했다. 낯선 곳에 발을 디딘다는 게 이렇게 많은 감정을 일으킬 줄은 미처 몰랐던 눈빛이었다.
이번 여행에는 배우 진태현, 박시은 부부도 동행했다. 부부는 자립준비청년과 인연이 깊다. 두 사람은 2019년, 대학생이 된 자립준비청년을 입양하며 가족이 됐다.
진태현은 최근 갑상선암 투병 사실을 공개하며 “잘 치료해서 이겨내겠다”라고 다짐했다. 청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밥을 먹고 사진을 찍고 조용히 옆자리를 지켰다. 오는 6월 중순 수술을 앞두고 있음에도 그는 “암까지도 완벽하게 이겨내는 배우이자 연예인, 마라토너의 모습 보여드리겠다”라고 전했다.
이번 여행에는 전국에서 선발한 18명(여성 12명, 남성 6명)의 청년이 함께했다. 고향도, 살아온 환경도 모두 달랐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이들 모두 보호 종료 후 홀로 살아가는 자립준비청년이라는 것. 아동양육시설, 공동생활가정, 위탁가정에서 지내다 만 18세 전후로 사회에 나와야 했다. 어른의 보호를 더는 받을 수 없을 때 삶의 모든 선택과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매년 2000명 안팎의 청년이 그런 선택 앞에 선다. 지금까지 누적 인원만 1만 명이 넘는다. 정부는 자립수당과 자립정착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지역에 따라 지원 규모도 차이가 크다. 대부분 1000만 원 이상 2000만 원 이하 수준이다. 서울은 2000만 원, 대전·경기·제주 1500만 원, 경남 1200만 원, 그 외 지역은 1000만 원을 지급한다.
복지 제도가 채워주지 못하는 건 ‘관계’다. 누구도 곁에 없다. 시스템은 있지만 이들은 늘 혼자였다.
최근 5년간 보호종료 청소년 수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고립은 여전하다. 2023년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자립준비청년 10.6%가 “대부분 집에 있거나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전체 청년 평균(2.8%)보다 3배 넘게 높다. 혼자 있으려 한 게 아니라 함께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여행은 관계 안에서 자라볼 기회조차 없던 청년들에게 사회와 연결되는 첫 번째 경험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함께 식사하고 처음 본 친구와 웃으며 사진을 찍고 같은 공간에 조용히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사회 안에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혼자 지낸 시간이 길었던 이들에게 여행은 낯설었지만 그 낯섦이 천천히 관계로 바뀌었다. 이름을 부르며 서로를 찾고 하루를 나누고 다음 여행을 얘기하는 사이가 됐다.
출발 당일, 인천공항에 가장 먼저 도착한 왕호성(25) 군은 “싱가포르가 정말 깨끗한 여행지라던데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라며 기대를 내비쳤다.
6시간 넘는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시간은 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20분 남짓. 청년들은 짐을 풀 새도 없이 싱가포르의 야경을 배경 삼아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렀다.
“잠은 집에서 자야죠. 여행 와서 자는 건 아깝잖아요.”
첫 해외여행의 설렘에 호텔 로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밤을 지샌 이들도 있었다. 안지혜(27), 이병헌(23), 막내 박소훈(18) 청년은 로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하루가 모자랄 만큼 여행을 만끽했다.
둘째 날 오전, 참가자들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높은 보행자 다리 ‘핸더슨 웨이브 브릿지’를 건넜다. 36m 높이, 물결처럼 굽은 다리를 따라 조심스레 걷는다. “싱가포르가 다 보이네”라며 청년들이 감탄을 자아냈다. 핸드폰을 꼭 쥐고 있던 손이 느리게 풀렸다. 긴장도, 어색함도, 그 위에서 조금씩 내려갔다.
하지레인에서는 낯선 거리 풍경을 담느라 분주했다. 도착하자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한결 편해졌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카메라 앞에 주저 없이 앞에 섰다. 단체사진에서는 어색함보다 생기가 더 많이 보였다. 이름보다 성격을 먼저 기억하게 된 건 그쯤부터였다.
점심을 먹고 만다이 야생동물 보호구역 내에 아시아 최초 ‘강’ 테마 동물원인 리버원더스로 향했다. 모두 보트를 타고 세계 강줄기를 따라가며 동물을 관찰했다. “와, 저건 처음 본다.” “진짜 커.” 말수가 적었던 참가자들도 목소리를 냈다. 익숙하지 않은 생물보다 신기했던 건,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보트, 예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라며 보트를 타던 참가자는 가이드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녁은 칠리 크랩이었다. 다들 한 번쯤 먹어보고 싶다고 했던 음식이었다. 이날은 조유정(20)양 생일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깜짝 생일파티가 열렸고 축하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유정 양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여행 오는 것 자체가 기대됐어요”라며 밝게 웃었다.
밤이 되자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서 슈퍼트리 쇼를 관람했다. 음악에 맞춰 빛이 퍼지고, 초대형 나무들이 조명으로 하나둘 밝혀졌다. 어둠 속에 서 있던 거대한 나무들이 음악과 함께 환히 빛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청년들은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도 저렇게 설 수 있을 거라고.
셋째 날은 조별 일정이었다. 처음엔 “스스로 계획하는 건 좀 걱정돼요”라고 말하던 이들이 “우리가 직접 고른 길이잖아”라며 앞장섰다. 누구의 안내도 없이, 각 조는 자신들만의 속도로 하루를 움직였다. 어떤 조는 미술관을 찾았고, 어떤 조는 테마파크로 향했다. 조용한 카페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써 내려간 이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서 자신이 선택한 길을 따라 걷는 하루는 이전과 다른 감정을 남겼다.
자유일정 비용으로 1인당 110SGD(약 11만 7200원)가 주어졌다. 식비, 입장료, 교통비를 포함해 모든 선택을 스스로 계획해야 했다.
4조는 싱가포르 안에서 현지 모습을 다양하게 경험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조장을 맡은 최정현(24) 군은 “오전에는 술탄 모스크에 들르고 기념사진을 찍은 뒤 가까운 박물관으로 이동해 관람을 마치고 오후엔 마리나베이샌즈 전망대를 거쳐 스펙트라 분수쇼도 보려고요”라고 전했다.
조원들이 하고 싶은 걸 전부 리스트로 정리하고 영업일이나 거리 문제로 제외할 곳을 빼고 일정을 조율했다. 최 군은 “유니버셜 스튜디오에 가고 싶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건 다른 나라에서도 갈 수 있으니까 뺐고 싱가포르에서만 할 수 있는 걸 중심으로 일정 짰다”고 덧붙였다. 여럿이 생각을 합쳐 만든 동선이었기에 움직이는 내내 만족도가 높았다. 예산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며 현실적인 선택도 배워갔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다시 마주한 청년들은 서로의 하루를 궁금해했다. “어디 다녀왔어?” “우린 공항 다시 가서 여기저기 둘러봤어.” 대화가 오가며 테이블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계획부터 실행까지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함께 조율한 하루였다.
마지막 날 아침은 센토사섬으로 향했다. 섬에 도착한 청년들은 루지 트랙을 두 번 달렸다. 이후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 다시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찾았다. 클라우드 포레스트 돔, 플라워 돔, 스카이웨이를 걸으며 “여기가 이래서 유명한 곳이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공항을 가기 전, 클락키에서 리버크루즈를 탔다. 강가를 따라 불빛이 이어졌고 모두가 말없이 앉아 싱가포르의 야경을 바라봤다. 이별보다 더 진하게 남은 감정이 천천히 밀려왔다.
자립준비청년에게 여행은 익숙하지 않다. 출국 전 사전 모임에서 서로의 취향과 고민을 나눴고, 현지에서는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며 조금씩 가까워졌다.
김지현(19) 양은 “살면서 내가 잘하는 게 뭔지 계속 찾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번 경험이 여러모로 큰 계기가 될 것 같아요”라고 밝혔다.
귀국 비행기 안, 창밖을 바라보는 얼굴에 변화가 드러났다. 낯설고 두려웠던 처음은 지나갔다. 대신 자신에 대한 믿음이 남았다.
이명수 함께하는 사랑밭 팀장은 “20대는 진로나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할 시기인데 자립준비청년들에게 그런 기회가 제대로 주어졌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요”라며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경험이고 진심으로 변화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라면, 당연히 그런 기회를 더 많이 받아야 하죠”라고 강조했다.
이 팀장은 이어 “이 친구들에게 당장 돈도 필요하지만 더 절실한 건 안전하게 시도해볼 수 있는 환경”이라며 “혼자 시작하기엔 감당해야 할 위험이 너무 큰데 이번 여행이 그걸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했다”고 전했다.
‘꿈 만들기’ 프로젝트는 노랑풍선 내 총무팀과 홍보팀이 함께 진행한다. 싱가포르를 이번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로 이상훈 노랑풍선 총무팀 대리는 “경제와 교육 관련 요소가 많고, 휴양지가 아니라 도시 구조를 직접 보고 배울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어요”라며 “그냥 따라가는 여행보다, 자기 주도적인 일정이 훨씬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라고 설명했다.
대학생이자 자립준비청년 처우 개선을 위해 여성가족부 청소년 정책위원으로 활동 중인 정윤서(21) 군은 “앞으로 진로나 삶의 방향을 결정할 때 이번 경험이 분명히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싱가포르는 땅도 좁고 인구도 많지 않지만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경제력을 가진 나라인데 직접 와보니 더 알고 싶어졌어요”라며 “예전엔 유럽 사례만 참고했는데, 지금은 싱가포르를 주제로 학사 논문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라고 말했다.
짧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한 사람의 내면이 움직였고, 마음이 열렸다. 처음이라 서툴렀지만 그래서 더 간절했다. 이 여행은 동행이었고 위로였으며 무엇보다 성장의 시간이었다. 사회와 연결되는 경험을 처음으로 가진 청년들이 이제는 스스로 다시 길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여행을 또 함께 걷게 될 것이다.
싱가포르 = 권효정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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