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1 01:43:18
[2025 칸영화제] 줄리아 뒤쿠르노 ‘알파’
칸영화제에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좋은 의미에서의 놀라운 이변이 아니라, 어찌 보면 다소 ‘망신’에 가까운 최악의 평가가 한 편의 영화에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영화 ‘알파(ALPHA)’입니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알파’는 황금종려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됐습니다.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이 전작 ‘티탄’으로 2021년 칸 황금종려상을 이미 받은 세계적 감독이기도 했고, 특히 영화 ‘알파’의 글로벌 배급사가 6년간 무려 ‘5회’의 황금종려상을 배출한 ‘네온(NEON)’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네온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일 오후(현지시간) 현재 ‘알파’에 대한 악평이 외신에 실시간으로 뜨는 중입니다. 가디언은 별 5개 만점에 별 1개를 주면서 “줄리아 뒤쿠르노의 신작 ‘알파’는 올해 칸영화제 경쟁작 중 가장 당황스러울 정도로 실망스러운 작품”이라고 뜻밖의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아니, 얼마나 ‘못’ 만들었길래 최악의 평가가 내려지게 된 걸까요? 20일(현지시간) 칸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팔레 드 페스티벌(축제의 궁전)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줄리아 뒤쿠르노의 문제작 ‘알파’를 살펴봤습니다.
이야기는 13세 소녀 ‘알파’에게서 시작됩니다. 영화 제목은 곧 주인공 소녀의 이름입니다.
어느 날, 알파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신종 마약 때문인지 원인은 불분명합니다), 아마추어 문신사와 친구들이 장난으로 알파의 왼쪽 팔뚝에 대문자 ‘A’라는, 10cm도 넘어 보이는 문신을 새깁니다. 바늘이 살갗을 뚫고 검은 먹물이 알파의 몸에 새겨집니다.
알파가 따돌림을 당해서는 아니었습니다. 혼몽한 상태였던 알파는 문신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남편 없이 혼자 알파를 키우는 알파의 엄마(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는 딸아이 몸에 흉측하게 새겨진 문신을 발견하고 기겁합니다.
문신이 흉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문신이 새겨질 때 문신사가 ‘더러운 바늘’을 사용한 건 아닌지, 그래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아닌지 싶은 모성의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한때 이 도시에는 기이한 바이러스가 돌았습니다. 이 병은 증상이 특이했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사람의 몸이 ‘매끈하고 단단한 대리석’처럼 점점 변했고, 결국 온몸이 딱딱해지며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감염자들은 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서 ‘흰 연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 질병은 주로 혈액을 통해 감염되는 질병이었는데, 병원 의사였던 알파의 엄마는 이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본 바가 있었고, 환자들이 어떤 최후를 경험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여부는 2주 뒤에나 나온다고 하니 알파의 엄마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진짜로 감염이 된 건지 알 수 없는 와중에, 알파는 문신 때문에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합니다. 문신 ‘A’의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아 피가 뚝뚝 흐르는 모습을 같은 반 친구들이 보게 된 것이었지요. 이 때문에 알파에게 이상한 질병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후 수영 수업에서 친구들과의 극심한 갈등 끝에 큰 사건이 벌어지고(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이 장면이 굉장히 문제적입니다), 알파의 학교생활은 더 힘들어집니다. 알파는 정말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걸까요. 여기까지가 영화 초반부 설정입니다.
영화 ‘알파’는 사회적 낙인에 관한 영화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알파는 신체의 변화를 겪었습니다. 소녀 알파는 이 때문에 소외를 경험합니다.
‘알파’에 나오는 문신과 바이러스는 과거 에이즈 포비아와 불과 몇 해 전인 코로나19를 연상시킵니다. ‘저 사람의 바이러스가 내게도 옮을 수 있다’는 공포를 우리는 수 년간 경험해 왔고, 그에 앞서 20세기 말 에이즈의 전 세계적인 유행으로 타인의 질병에 대한 극단적 공포가 전 사회를 휩쓴 적도 있었습니다.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바로 이러한 공포에 착안해 이번 영화 ‘알파’를 연출했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비판적인 지점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대리석처럼 딱딱하게 몸이 굳는 질병’이라는 다소 황당한 설정도 그렇지만 인과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한 점이 더러 발견됩니다. 우선 자신의 몸에 문신이 새겨지는 아픔에 알파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도 개연성이 떨어지고, 그보다도 너무 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한데 섞어버렸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영화에는 ‘헤로인(마약) 중독자’인 알파의 삼촌이 알파와 함께 이 영화의 중심 인물로 등장합니다.
알파와 같은 방에 살게 되는 삼촌은 조카 알파가 당하는 낙인의 고통과 자신이 경험했던 ‘중독자’로서의 무력감을 일치화합니다. 이 때문에 조카와 삼촌 두 사람은 ‘낙인 찍힌 자’로서의 슬픔을 공유합니다. 하지만 알파의 5세 시절과, 13세 시절까지 뒤섞는 편집 때문인지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혼란스럽습니다.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신체의 변화에 따른 인간 심리를 다뤄왔습니다. 신작 ‘알파’의 중심 소재가 문신이라면, 2021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티탄’에선 중심 소재가 교통사고로 머리에 심은 티타늄이었지요.
‘티탄’에서 주인공 여성 알렉시아가 ‘자동차와 섹스하고’ 심지어 ‘임신까지 하는’ 설정은 오히려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알파’는 알파와, 알파의 삼촌과, 알파를 가르치는 교사의 상황을 하나로 엮는 데 실패한 듯합니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 작품을 평가하는(4점 만점) 스크린데일리 그리드에서 이번 영화 ‘알파’는 현재 1.5점을 받아 ‘꼴찌’를 기록 중입니다. 칸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의 신작치고는 박한 평가이지요.
놀랍게도, 평점을 준 12명의 영화 전문가 중 2명은 영화 ‘알파’에 1점도 아닌, 아예 ‘0점(X로 표기)’을 줬습니다. 이런 수모와 굴욕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황금종려상을 이미 수상한 감독의 작품에 ‘빵점’을 줄 수 있는 용기도 참 놀랍습니다.
이걸 ‘소포모어 징크스(성공적인 작품 이후 차기작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라고 봐야 할까요. 인생도 오르고 내려가는 롤러코스터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외부자의 혹독한 평가가 칸영화제 심사위원회의 심사결과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심사위원들은 ‘알파’에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심사위원들이 스크린데일리와 외신의 평가를 완전히 외면하진 못하리란 전망이 우세합니다. 24일(현지시각) 열리는 칸 시상식에서 줄리아 뒤쿠르노는 2021년에 이어 다시 한번 시상대에 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