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6.27 21:00:00
개그우먼 이수지의 대치맘 패러디가 화제다. 현실을 그만큼 절묘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아직 옹알이하는 어린아이의 어휘력에 감탄하고, 뚱땅거리는 피아노 소리에 영재를 기대한다.
자녀가 커감에 따라 그들의 입시, 취업, 결혼이 부모의 성적표가 된다. 중년 동창 모임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한 동창이 차지한다고 한다. 어느새 자녀의 인생이 본인의 인생으로 치환된다.
대학에서도 학생 성적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학부모 전화가 매 학기 이어지고, 수강 신청과 지도교수 배정에도 관여하겠다는 맹렬 학부모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회사 취업 이후에도 상사에게 결근을 대신 알리는 부모가 적지 않다.
이런 뿌리 깊은 유대감은 실증적으로도 증명된다. 올해 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펴낸 ‘초기 성인기의 부모·자녀 관계와 사회 계층적 차이’라는 보고서는 우리나라 부모 3명 중 2명이 자녀의 성공과 실패를 부모 책임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설문 대상인 19~34세 자녀가 있는 45~69세 1600명 중 67%가 자녀의 성공과 실패에 부모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특히 부모의 교육 수준이 높고 자산이 많을수록 이런 경향이 더욱 크다. 부모가 경제적 여력이 있는 한 모든 지원을 당연한 책무로 인식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자녀에 대한 무한 책임이 끔찍하게 표출되는 가장 비극적인 경우가 ‘비속 살해’다. 빚에 몰려, 범죄로 처벌받아, 심지어는 우울해서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 뒤에 남을 자녀를 미리 해한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비속 살해 후 자살한 사람은 160명으로 연평균 20여명에 달하며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인다. 자녀만 죽고 부모는 살아남는 경우도 적지 않다.
비속 살해는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들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으로 결론 내린다. 자신의 인생이 어긋났다 해서 자녀까지도 실패한 작품으로 여긴다. 비뚤어지고 왜곡된 무한 책임의 모습이다.
성인이 된 자녀에게 무한 봉사하는 부모나 비속 살해를 저지르는 부모나 모두 자녀를 여전히 부모의 소유로 여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녀 삶의 독립적 가치를 낮게 보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해야 하는 부속품으로 치부한다.
스스로 얽어매는 굴레가 아니더라도 자녀와 부모를 하나로 보는 편견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있다. 영국 총리 스타머가 의회와 학교에서의 상영을 지지한다고 밝힐 정도로 사회적 파장이 컸던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동급생을 살해한 11살 소년을 중심으로 사건의 원인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범행을 저지른 소년의 부모가 이웃으로부터 테러도 당한다. 거처를 옮길 정도로 부모의 고통이 커지지만, 결국 범행의 원인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 냉정하기만 한 서구에서도 자녀의 범죄 앞에서는 부모가 견디기 어려운 수모와 질타를 받는다. 하물며 부모의 무한책임 문화가 작동해 자녀의 취업과 결혼, 출산이 늦어지는 우리 사회는 오죽할까 싶다.
이제는 자녀를 놓아줄 때다. 부모의 작품이 아닌 온전히 별개의 인격체로 인정해야 한다. 자녀의 성장과 성숙은 독립된 자아로서의 과정이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삶은 영원히 미숙아의 영혼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부모도 벗어나게 해야 한다. 자녀의 허물은 부모 탓이 아니다. 성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는 자녀와 분리된 부모의 인생이 존중받아야 한다. 자녀와 부모는 별개다.
[장지호 사이버한국외국어대 총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5 (2025.06.25~07.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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