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6.13 12:24:06
“당신은 ‘없음’을 볼 수 있습니까?”
회심(回心)이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종교적인 행위다. 더 이상 과거 언행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깨달음이자 의지이자 실행이다. 회심이란 사방의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여 이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자신을 보고, 듣고, 새롭게 느끼는 행위다.
그리스도교는 회심의 종교다. 엘리야는 시내산에서 ‘섬세한 침묵의 소리’에 존재하는 신을 만났다. 신은 더 이상 건물이나 교리에 존재하지 않고 인간 누구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혁명적인 은유다. 신은 침묵을 경험하는 자에게 스르르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낸다. 바울(원래 이름은 사울)은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를 추종하는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지중해 동서 교류의 중심지 다마스쿠스에 갔다 “사울아, 사울아”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 후, 그가 이전에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없음’을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만일 그리스도교에서 바울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교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 등장하는 유대 종교의 한 분파로 연명하다 금방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리스도교를 유럽 종교와 세계 종교로 탈바꿈시킨 주역이 바울이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다. ‘사울’이란 히브리로 ‘신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자’란 의미로, 이스라엘을 건국한 사울의 이름과 같다. 사울은 타르수스라는 섬에서 태어나, 유대교 회당에서는 유대 경전을, 그리스 김나지움에서는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을 섭렵했다. 그는 ‘신으로부터 요청받은 자’란 의미의 이름을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란 의미의 그리스어 ‘파울로스’로 개명했다. 파울로스가 영어 ‘폴(Paul)’, 한국어 ‘바울’이 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로마에 도착한 천재 화가 카라바조에게 베드로와 바울의 그림을 요청하였다. 1600년 가을 카라바조는 교황청 재무총장을 지냈던 티베리오 체라지를 만났다. 그는 아고티스노 수도원의 포스카리 소성당(Cappella Foscari)을 구입하였다. 그는 소성당 안을 장식할 두 그림을 카라바조에게 의뢰하였다.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1601년)’과 ‘바울의 회심(1601년)’이다.
카라바조는 신약성서 ‘사도행전’ 9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회심’ 이야기를 읽었다. 사울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유대인의 정치적인 독립과 종교에 방해가 된다고 확신했다. 특히 로마제국이 예수 운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유대인 스스로가 이 집단을 와해시킬 것을 바라고 있었다. 사울은 예수의 ‘도(道)’를 신봉하는 자들을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이송하려 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더니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이 내려왔다. 그래서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사울은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신비를 경험하였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교의 근간이 되는 이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다만 그의 예술적인 멘토인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성 바울 예배당에 그린 프레스코의 표현 방식과 주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고희가 가까운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울 3세의 명에 따라 ‘최후의 심판’ 벽화를 거의 완성할 때, 교황의 이름, 바울의 회심에 관한 웅장한 그림을 그렸다.
당시 그린 ‘바울의 회심(그림 ➊)’은 카라바조의 특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긴 턱수염이 난 사울은 거의 나신으로 땅에 떨어져, 하늘로부터 내리쬐는 빛을 두 손으로 가리며 어쩔 줄 모른다. 놀란 말은 뒤를 돌아보면서 거품을 토해낸다. 바울의 나이 든 하인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왼손으로 초승달로 장식된 방패를 들고 깃털이 달린 반짝이는 투구를 쓰고 있다. 코미디 오페라의 한 장면이다. 그는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를 하늘로부터 들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어 공중에 대고 칼을 휘두르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에 천사와 함께 땅으로 내려온 턱수염이 달린 그리스도는 오른손을 펴서 사울을 일으켜 세우려 한다. 천사와 그리스도는 너무 갑자기 땅으로 내려와 마치 나뭇가지에 걸린 낙하산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다.
사울의 과거는 악과 무식…하나님이 보내주신 빛의 세례
이후 카라바조는 심기일전하여 ‘시도행전’ 9장을 다시 읽었다. 그는 ‘바울의 회심’은 자신의 예술철학을 구성하는 두 개의 축, 즉 빛과 어둠에 관한 이야기란 사실을 깨달았다.
사울의 과거를 상징하는 악과 무식, 하나님이 보내주신 빛의 세례를 받아 그의 영혼이 다시 태어났다. 신적인 광선이 그에게 침투하여 진리와 믿음이 그를 가득 채웠다. 카라바조가 ‘마태의 소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한순간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사도행전’ 9장 3절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이 구절은 바울 회심의 핵심을 담고 있다. 그는 첫 번째 그림에서 무대장치로 그린 천사와 그리스도를 빛으로 대치하였다. 여기에는 소란이나, 난리나, 코미디도 없다. 단순하게 어둠이 광명으로 대치된 순간이다.
바울의 하인은 말 뒤에서 조용하게 생각에 잠겨 기다린다. 말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진 주인을 밟지 않으려고 오른쪽 앞발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바울은 땅에 떨어져 누워 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열고 그를 둘러싼 빛을 포옹하고 있다. 그에게 진리와 지혜와 사랑이 임재하는 순간이다. 카라바조는 이 회심 이야기에서 부수적인 적을 모두 제거하고 빛으로 가득한 바울을 그렸다. 바울은 자신의 세계를 구성해왔던 눈과 귀를 새로운 눈과 귀로 대치하였다. ‘사도행전’ 9장 8절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다. 그는 이전에 볼 수 없던 ‘없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배철현 더코라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4호 (2025.06.18~25.06.24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